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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인아 Apr 12. 2022

21살 푸르던 대학생의 제법 무거웠던 자기 성찰

-2016년도에 교양과목 과제로 썼던 수필-

삶을 살아가며 그 시기가 빠르든 느리든, 누구든지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을 통해 성장한다.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보면 어떤 사람보다도 가장 가까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장 잘 알 것 같지만, 어떻게 보면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모르는 면에 많으며 매 순간 새로운 존재이다. 그렇기에 평생 이해하려 노력이 필요한 존재가 바로 ‘나’이다. 자기 성찰을 하다 보면 내가 하는 행동은 비단 나만 하는 행동이 아닌데 유난히 어색하고 부끄러울 때가 있고, 누구나 겪는 일일 텐데 다른 사람의 몇 배의 행복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사람은 ‘인간’이라는 공통성을 가지기 때문에 사람이라면 가질 수 있는 유사한 성격과 행동유형을 가지고 있지만, 그 정도와 표현방식이 조금씩 다르다. 왜냐하면 사람들마다 살아온 삶과 만들어진 생각의 틀이 달라 바라보는 시선도, 해석하는 방식도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 또한 주변 사람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성격과 행동들을 하며 살아가지만 그 속에서도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제부터 여느 사람들과 같은 듯 보이지만 나에게서 발견되는 ‘나’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 중 한 조각을 풀어보려 한다.


필자는 중, 고등학교 시절 목각인형 같은 삶을 살아왔다. 타인의 의지에 따라 팔과 다리를 움직이며 ‘나’의 의사 따위 배제한 삶을 살아왔다. 어머니가 원하는, 선생님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해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1등급을 원하면 1등급을 받아오고, 과제를 해오라고 하면 무조건 해가는 올곧은 딸이자 학생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라 생각했고 스스로에게 그 생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자아정체성을 상실한 삶에 ‘중독’된 고등학교 시절을 지낸 뒤, 드디어 대학생이 되었다. 사춘기 때 찾아야 했던 자아정체성을 찾지 못한 채 대학생이 된 나는 매일을 혼란과 고통 속에 살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모른 채, 급격히 변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내면의 고통은 외면하며, 혼란스러워하는 자신을 끊임없이 다그쳤다. 하지만 미봉책과 다름없던 ‘다그침’ 전략은 무너졌고, ‘기숙사’라는 골방에 틀어박혀 긴 시간을 내면과 마주 앉아 깊은 방황에 빠져들었다.


앞에서 말한 긴 시간 동안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필자는 이십 년을 살면서 한 번도 자신의 내면을 ‘나’의 눈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즉, 항상 타인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내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가장 먼저 발견한 점은 성격이 조용하고 밖으로 표출하는 것이 적고 그만큼 생각의 뭉치가 거대하다는 점이다. 책을 읽으면서도, 영화를 보면서도, 벤치에 앉아 행인들을 바라보면서도, 끊임없이 내 생각 뭉치는 격렬하게 꿈틀거리며 불어나고 있으며 그 요동을 쉬이 넘기지 못하며 인지하고 질문하고 답을 찾으려 애쓰고 있었다. 답을 찾지 못할 때도 많다. 사람의 생각이 수학 문제처럼 정해진 수식과 답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답을 찾기 위해 심리학 서적을 찾아 읽기도 하고, 타인의 의견을 묻기도 하며, 누구도 납득할 수 없는 자신만의 위로를 하기도 한다. 이렇게 나는 내가 나만의 생각 뭉치 속에서 질문과 답 찾기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사람임을 깨달았다.


내가 생각과 질문을 반복하는 사람임을 깨닫게 된 적이 있다. 스무 살 어느 날 하루, 학교 소파에 앉아 과제를 하다가 문득 집중력이 떨어져 주변을 둘러보며 머리를 식혔다. 주변에서는 좀 전 내가 내 과제에 집중하고 있었듯,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 만의 삶에 의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그 행인들에게 궁금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지금 이 순간 왜 바쁜지 알까?’ ‘이 질문에 대해 궁금해 하기는 할까?’ 이 질문들을 하면서 나의 내면에서는 많은 감정들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과제와 시험이 반복되는 바쁜 삶에 대해 권태를 느꼈고, 바쁘지 않은 삶 속에서는 바쁜 삶을 또다시 갈망하고 바쁜 삶 속에서 살아있음을 느낄 내 자신이 모순적이었다. 또한, 그렇게 바쁜 모습들을 바라보며 할 일이 있지만, 여유로움을 가장하여 소파에 앉아 그들을 위선적으로 바라보는 내 자신에 대해 염증을 느꼈다. 그리고 바쁜 삶에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멋대로 일반화시키고 어두운 시선으로만 바라보는 내 자신에 대해 적지 않은 연민을 느꼈다. 지금까지 한 생각들이 논리력과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고 과제하기 싫은 몸부림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철학자가 된 듯 한 착각과 함께 뿌듯함에 심취했다.


관계에 있어 필자는 ‘비사교적이고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으며, 기존 관계를 깊고 단단하게 만들어나가는 방향으로 관계를 정립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누군가가 이 성격을 알게 된다면 ‘성격을 바꿔봐’, ‘활발해지려고 노력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마도 그들은 내가 안타깝거나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것이다. 나 또한 내 성격에 대해 질책해보고 활발해지려 노력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누구나 타고난 성격이 있고 오랫동안 삶의 흐름 속에 섬세하고 단단하게 조각되어 바꾸기 힘든 부분도 있는 것이다. 대학생이 된 후, 고등학교 시절의 슬프고 부족했던 사회적 관계를 보상받고 싶었는지 서울에서 만난 모든 사람에게 친절했고 웃는 모습만을 보였다. 하지만, 자아가 없는 상태에서의 타인을 바라보는 사회적 관계는 한없이 맹목적이면서 빈 껍데기뿐이었다. ‘나’는 이 세상 모든 이가 인정하더라도 내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진정한 자아가 어떤 시선과 빛이 닿지 않는, 마음 한 귀퉁이에서 곰팡이를 피운 채 20년을 지내온 것이었다. 20년 만에 나의 눈에 들어온 가엾은 나의 자아가 더 이상 방치되지 않고 보살펴지지 않은 세월만큼 정성을 쏟아주고 싶었다. 지금까지 몰랐던 나의 호불호와 구체화된 의견에 조금 더 힘을 실어주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앞으로도 사람에 대한 경계심을 줄이고 더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자신을 갖기 위한 변화를 도모한 삶을 살지만 성급한 변화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변화를 하되 달팽이가 기어가듯 천천히, 나무늘보가 걸어가듯 여유롭게 이루어 나가려 한다.


나에게 있어 자신에 대해 면밀히 들여다보고 깨닫는 과정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처음으로 스스로에 대해 자각하게 되었을 때, 부족한 자질이 부끄러워 한없이 외면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한 자아성찰을 통해 처음 알게 된 모습도 있었고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면이 표면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이처럼 나의 내면을 세세히 바라보고, 때로는 여러 개의 자아를 느껴보며, 객관적 시점에서 자아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방황하는 과정은 나를 치유했고 성장시켰다. 앞으로도 몰랐던 나 자신에 대해 더 알아가고 이해하려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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