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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크라운: 여왕 엘리자베스와 세 사람

넷플릭스 [더 크라운] 1시즌 총평

by 겨울달


[더 크라운] 두번째 감상문이다. 첫번째 감상문은 넷플릭스 시사회에서 1, 2편을 보고 나서 적었다. 개인사정으로 공개날 달리지 못하고 그 다음 주말인 오늘! 나머지 8편을 보게 됐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숨쉬는 것도 잊은 채 8편을 몰아봤다.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일을 그려내는 것이 아닌데도(물론 그런 내용도 있다) 왜 눈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푸욱 빠져드는 것인가. 한편 한편 보다보니까 몇 시간 따윈 금방 지나갔다.


[더 크라운]은 섬세하고, 정교하다. 그저 넘어갈 수 있는 작은 것들 하나 버리지 않고 꼭꼭 맞물린 전체가 돌아간다. "스위스 시계"라는 표현처럼 너무나 잘 들어맞는데 기계적인 느낌도 아니고, 물이 흐르듯 조용하고 자연스러운데 그 사이에서 많은 사건과 감정이 소용돌이친다. 1, 2편을 보고도 이거 좀 재미있겠다 싶었지만, 놀랍게도 뒤로 가면 갈수록 더 재미있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지 ㅎㅎ


특히 드라마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엘리자베스 여왕과 그를 둘러싼 세 사람, 남편인 필립 공, 동생인 마거릿 공주, 그리고 당시 수상인 처칠과의 관계는 극본도 연출도 최고의 실력자들이 온갖 정성을 다 쏟아서 만들어낸 섬세한 공예품 같은 느낌이다. 물론, 그 공예품이 무조건 사람들의 웃음을 짓게끔 생기진 않았을 것이다. 엘리자베스와 세 사람의 관계 또한 웃음이라는 것이 존재하나 싶을 정도니까.


이미지출처=Jason Ball/Netflix

망국의 왕자에게 홀딱 반한 어린 공주는 왕실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고,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기 바랐다. 하지만 그녀는 왕위를 이어야 하는 공주였고, 아버지인 왕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젊은 나이에 여왕이 된다. 왕관이 주는 무게,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바로 무너질 것 같은 왕실의 권위, 나이브한 여왕이라는 세간의 평가에 힘들어하는 엘리자베스. 문제는 남편이라는 필립 또한 갑자기 달라진 상황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호기 넘치고 전도유망한 군인이었던 필립은, 영국 왕실의 안녕을 위하여 아이들에게 자신의 성을 물려주는 것을 포기해야 했고, 한없이 냉정하고 차가운 왕궁에 들어가 살아야 했다. 영국 국민과 전세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가장 먼저 자신의 아내에게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 결국 자신은 여왕을 빛내는 존재 외에는 그 무엇도 될 수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힌 필립과 자신을 전혀 도와주지 않는 남편을 보며 마음의 상처를 입은 엘리자베스의 관계는 점점 멀어진다. 문제는, 이 부부에게는 이혼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는 것.


결국 열등감과, 무력감과, 질투 때문에 필립은 엘리자베스가 오랜 친구인 말 사육사 포체스터 공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비꼰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는 건 참아도 당신이 그러는 못 참아! 엘리자베스의 이 말이 사실 이번 시즌 필립과의 관계의 클라이맥스가 아닐까?


모두가 유감스러워하며 불만을 가질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사랑한 사람은 당신뿐이에요.
당신도 내 눈을 보며 나와 같은 말을 할 수 있나요?



이미지출처=Jason Ball/Netflix

마거릿 공주와의 문제는 이와는 조금 다르다. 조용하게, 색깔없이, 평범한 삶을 바랐던 엘리자베스와 달리 아름답고 화려하며 영국 사회에서 일종의 아이콘과 같았던 마거릿은 자매이지만 너무 달랐다. 그리고 서로가 가장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었다. 마거릿은 엘리자베스에게 쏠리는 그 모든 시선을 부러워했고, 엘리자베스는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당하지 않는 자유로운 마거릿의 삶을 원했다. 하지만 여왕은 엘리자베스였고, 왕실의 권위를 지켜야 하는 것은 엘리자베스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유일한 여동생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를 뺏는 일이어도, 엘리자베스는 입술을 꽉 깨물고 해야만 했었다.


요즘에야 시대가 당연히 바뀌었다. 여와의 아들과 딸이 이혼했고, 왕세자는 오래전 교제했던 여성과 재혼했다. 왕세손은 오랜 연인인 평민 여성과 결혼했고, 다른 왕자는 최근 이혼한 미국인 배우와 교제하고 있다. 하지만 시류에 정말 느리게 반응하는 영국 왕실. 18세기에 제정된 낡은 결혼법으로 공주와 이혼남 피터 타운센드의 결혼을 막는다. 대중의 응원보다 왕실 법도와 종교적 가르침이 더 중요하다는 이유로. 굉장히 아이러니한 건,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는 사실 헨리 8세가 "이혼을 쉽게 하기 위해" 만들어냈는데, "살아있는 배우자가 있는 여성과 결혼해서는 안된다"라는 교리가 남아있다는 게 너무나 무시무시하다.


결국 여왕으로서, 피터와 결혼해서 왕실 가족으로 지내게 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린 엘리자베스. 절망하는 마거릿에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될 거라고 위로하지만, 마거릿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강한 척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이런 날 잘 아는 사람은 피터 뿐이야. 날 안정시키고 보호해 주거든.
내 말 이해한다고 하지 마. 언니는 이 불안하고 흔들리는 마음을 조금도 몰라.
피터만이 날 잡아줄 수 있어.
피터 없이는... 어쩔 줄을 모르겠어.


이미지출처=Jason Ball/Netflix


마지막으로 윈스턴 처칠. 정치라면 이젠 본능보다 더 감각적인 노인은 준비되지 않은 군주 엘리자베스와의 암묵적인 합의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 그는 상대당뿐 아니라 자신의 당에서도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에게, 영국이 다시 세계를 아우르는 제국이 되기 전까지 절대 총리 자리를 내어줄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부왕의 서거로 후계자 교육을 받지 못한 엘리자베스를 지도하는 것 또한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젊은 여왕이 내린 "판단 착오"를 왕실을 위해서 "바로 잡으려" 힌다.

다른 사람들, 특히 그의 주군이자 통치에 있어 파트너인 여왕에게 처칠은 자신의 건강이 악화되고 있음을 숨긴다. 그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절대 그의 몸이 쇠약해져가는 것을 드러내서는 안 되기 때문. 여왕은 정치적 권모술수로 자신을 지그시 압박하는 총리와 그외 각료들에게 처음으로 여왕다운 모습을 보인다. 마치 여왕의 개인교사 말대로 "가정교사가 영국 상류층 아이들을 혼내듯" 정확한 법규에 따라 처칠을 문책하는 엘리자베스는, 이제 권위라는 것을 아는 여왕이 되었다.


충분히 회복했나요?
다시 집무를 볼 수 있을 정도로요?
답변을 하실 때는
제 지위를 잘 고려하여 답하시되
나이나 성별은 고려치 않으셨으면 합니다.


[더 크라운] 1시즌에선 젊은 여성 엘리자베스가 여왕이 되고, 진정한 여왕다움을 갖춰가는 과정에서 잃어버리는 것들에 대해 그리고 있다.

군주가 된다는 건 왕관 앞에서 자신을 지우고 왕관 그 자체가 되어야 하는 법. 엘리자베스는 이를 배우면서 군주의 자리에서 외로움을 느낀다. 처칠은 은퇴하고, 마거릿은 절망에 빠지고, 필립마저 그의 곁에 없는 여왕은 결국 자신에게 남은 왕관과 함께 한다.


하아... 정말 군주의 자리가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물론 민주공화국 시민이라 이렇게 느낄 수도 있겠지. 하지만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인생의 모든 일을 누군가가 재단하고, 누군가는 왕이 되어서 평생 그 재단된 삶에 맞춰 살아야 한다는 게 상상만해도 너무 끔찍하다. 게다가 인간으로서 가슴이 시키는 선택을 할 수 없어서 가족들의 원망을 받고, 인간적인 선택을 하면 일국을 이끄는 왕답지 않다는 세간의 비판을 받고... 그 중간 지점을 찾아 발를 디딛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다. 그러니 이 일을 60년 가까이 해온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존경심과 동정심 둘 다 느껴지게 된다. 특히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며 스스로는 더 아파할 드라마속 그녀가 안타깝다는 마음도 생긴다.


벌써부터 2시즌이 기다려진다. 내년에 공개될 텐데... 기다리다 지쳐 쓰러질 때쯤 돌아오겠네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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