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틱 영화의 거장을 다시 생각하다
야한 사진 없어요...
어느 시기엔 태어나지도 않았고 태어났어도 너무 어려서 기억 따윈 없는 80년대, 그땐 우리나라나 외국이나 살색 가득한 영화들의 전성기였다고 한다. 그때 만들어졌던 수많은 영화들이 30년이 지난 지금도 어느 평범한 시청자의 밤을 끈적하게 (!!) 만들어주고 있다.
그중 발군은 [나인 하프 위크]일 것이다. 80년대 에로티시즘의 절정? 정도로 설명 가능한 작품. 킴 베이싱어와 미키 루크는 80년대를 대표하는 미쿡미녀 미쿡미남이었다. 몇 년 전 제2의 전성기를 맞은 미키 루크를 보며 "왜 저 때의 외모를 유지하지 않았나 (못했나)?"라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지만, 그래서 찰나 같았던 몇 편의 영화가 소중하지 않나 싶다.
암튼 [나인 하프 위크]가 미국의 에로티시즘 영화의 대표작이 된 건, 두 사람의 공이 크다. 한 사람은 감독인 애드리안 라인. [위험한 정사], [로리타], 그리고 [언페이스풀]까지, 위험하고 관능적인 사랑을 특유의 끈적한 느낌으로 그려내는 탁월한 연출력을 가진 감독이다. 다만 마지막으로 공개된 작품이 [언페이스풀]인데 이게 2002년...?
그리고 다른 한 사람. 바로 이 영화의 극본을 쓰고 제작을 맡은 잘만 킹이다. 미국 에로티시즘 영화의 대부라고 불리며, 그 이후 연출, 극본, 제작 등 다방면에서 "에로영화"에 예술이라는 걸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인물이다. 어쩌면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거나, 아니면 너무나 많이 들어봤거나. 어디에 관심(?!)을 가지느냐에 따라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의 대표작은 [투 문 정션]. 나이가 좀 먹고 나서 그 내용을 돌이켜보니 느낌이 너무나 다른 영화. 이 영화뿐 아니라 다른 영화에서도 잘만 킹은 언제나 육체의 관계에서 여성을 주목했다. 그리고 단순히 여성의 몸에만, 또는 여성이 맺는 관계에만 주목한 게 아니라 여성이 주체적으로 사랑하고 선택하는 모습을 그린다. 주인공 에이프릴과 섹시한 정원사와 열렬하고 운명적인 사랑을 했을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섹시한 남자라 땡큐하지만, 그가 아닌 누구라도 얌전한 명망가 아가씨의 속에 자리 잡은 욕망을 꺼내 줄 수 있다면, 에이프릴은 망설임 없이 그와의 관계를 선택할 것이고, 현실과 욕망의 수위를 교묘히 조절하는 스릴 넘치는 이중생활을 했을 것이다.
2002년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잘만 킹은 "에로 영화의 스타일"을 만들었다. 80년대, 90년대의 "고급진 에로영화"라고 하면 떠올리는 그 장면. 어디선가 색소폰 소리가 울리는 것 같고,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슬로우 슬로우, 마치 끈적한 춤을 추는 느낌의 동작들. 그 스타일의 시작에는 잘만 킹이 있었다.
이후 영화계 전반적으로 에로티시즘에 대한 요구는 80년대에 비해서 많이 사그라들지만, 독보적인 존재인 잘만 킹은 그 이후에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왔다.
그가 1992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에로티시즘을 TV로 옮겨온다 [레드 슈 다이어리]라는 이 드라마는 배경을 설명하는 TV 영화가 먼저 제작됐고, 이를 이어 시즌당 13편 정도의 드라마가 몇 년간 방영됐다.
[레드 슈 다이어리]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모든 것을 잃게 된 남자 '제이크(데이비드 듀코브니)'가 낸 광고에서 시작된다. 너무나 사랑한 약혼자 '알렉스(브리짓 바코)'가 자살한 후 실의와 슬픔에 빠진 제이크는 그녀의 일기를 읽고서야 그녀가 젊은 건설노동자 '토마스(빌리 워드)'와 불륜 관계였음을 알게 된다. 일기 속의 알렉스는 제이크에게 보였던 따뜻하고 밝은 미소를 가진 사랑스러운 여자가 아니었다. 빌리와 위험한 관계에 빠져든 알렉스는 욕망에 충실하고, 위험함을 향해 돌진하는 솔직한 여성이었다. 하지만 완벽하지만 안전한 제이크와 위험하지만 뜨거운 빌리의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녀는 결국 이중적인 모습을 고민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제이크도 빌리도 그녀를 사랑했지만 정작 그녀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알렉스의 은밀한 내면을 알지 못했던 제이크는, 많은 여성들에게 그들의 가진 사랑 때문에 입은 상처, 솔직한 욕망, 억누를 수 없는 열정에 대한 이야기를 보내 달라고 한다.
드라마의 (초기 시즌) 에피소드는 제이크가 사서함에서 우편물을 꺼내서 편지를 확인하고, 반려견 스텔라와 함께 그 편지를 읽는 것에서 시작된다. 익명의 편지이기 때문에 더 은밀하고 내밀한, 이미 지금이라면 아마 IP 주소까지 비공개 처리된 익명의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올 만한 비밀스러운 이야기들.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수많은 여성 화자들은 지금의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여성 주인공만큼이나, 아니 몇몇은 그보다 더 용감하고 솔직하다.
여기에 잘만 킹 특유의 미려한 에로틱 스타일이 더해진다. 모호한 대사들, 한 번쯤 어렴풋하게나마 상상해봤을 상황들, 카메라가 인물의 육체를 훑는 방식, 그리고 이제는 익숙한 스코어의 조합. 사람들이 체면을 차리려 눈을 반쯤 가리고 보는 수많은 야동들이 부끄러울 정도로, 성(性)을 아름답게, 천박하지 않게 그려내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게다가 이 모든 이야기의 화자는 여자이며, 주체적인 행위를 하는 사람들도 여자다. 남자들은 여자들의 도전과 도발에 반응하고, 여자들과 제대로 밀당하며 자신들 사이의 끌림의 해답을 함께 찾아나간다.
첫 방송이 무려 24년 전, 마지막 방송도 20년 전에 했던 드라마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요즘 나오는 에로에로한 영화나 드라마에 비해 이야기는 더 짜임새 있고, 여성의 욕망은 더욱 솔직하게 그려낸다. 최근 나온 소위 "에로티시즘"을 표방한 영화들이 '스토리가 없고' '메시지가 없는 것'이 포XX와 다를 바가 없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모든 행위에서 짜릿한 이야기를 찾는 나는, 화면을 채우는 적나라한 몸을 통해서 한 이야기꾼이 풀어놓은 이야기들에 다시 귀를 기울이게 된다.
p.s. [레드 슈 다이어리]의 초기 시즌 3개 정도는 각 IPTV에서 모두 서비스하고 있을 것이다. 혹시나 호기심이 생긴 분들께 친절하게 알려드리는 센스. :P
p.p.s.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잘만 킹은 사망할 때까지 평생의 소울메이트와 함께 살았다. 잘만 킹의 부인인 패트리샤 루이지애나 놉은 오랜 시간 동안 잘만 킹과 함께 일한 제작 파트너다. 부부의 둘째 딸 클로이 킹은 [레드 슈 다이어리]의 프로듀서로 일하기도 했다. 그리고 데이비드 듀코브니는 잘만 킹의 친구로, [엑스파일] 때문에 부득이하게 시리즈에서 하차해야 했지만 자신이 잘만 킹과 작업을 같이 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한다. 오래전 살색 좀 많이 나오는 영화에 출연한 것을 필사적으로 감추려는 사람들이 많은데, 듀코브니의 태도가 신선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