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겨울달 Dec 23. 2015

랑야방: 지옥에서 돌아온 자가 펼친 슬픈 복수극

<랑야방>의 종영을 앞두고

작년 이맘때쯤에 뭘 했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아니다, 기억은 난다. 마르코 폴로 자막하면서 지냈으니까. 암튼 작년 이맘때 나 자신에게 '너 1년 뒤에는 중국 드라마 열심히 보고 있을 거야.'라고 했으면, 과장 1그램 없이 엄청나게 비웃었을 거다. 중국 드라마야 일본 드라마보다 많이 보긴 했지만 이걸 뭐 '열심히 보는 거'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게 웬걸. 2015년 12월 23일의 나는 오늘도 밤 10시만 되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한 지 이제 두 달째다. 이제 '랑야방'의 방송 종료를 이틀 앞두고, 본진인 미드를 거의 잊을 정도로 날 위험하게 만든 이 드라마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대체, 왜 봤던 걸까?


'랑야방: 권력의 기록' / Source: 중화TV 웹사이트

한국 중화TV(찬양하라 중화티비)에서는 '권력의 기록'이라는 패기 넘치는 부제를 붙였다. 처음엔 왜 붙였을까 싶었지만, 이 부제만큼 이 드라마를 잘 설명하는 말은 찾기 어렵다(금릉 로맨스 이런 거 빼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며, 살아남는 자의 기록이다. 13년 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사람들의 원혼이 다시금 살아나지 않는 이상 그들은 반역을 일으킨 역적이고 반군이었다. 그걸 잘 아는 매장소는 '기록을 다시 쓰는 것'으로 복수를 완성한다. 그가 원한 복수는 7만 적염군을 사지로 몰아넣은 사옥, 하강의 죽음이나 기왕의 마지막 말을 외면한 예왕의 죽음이 아니었다. 그는 기록을 다시 쓸 수 있는 사람, 권력을 쥐고 있는 자를 압박하고 바꿈으로써 후대에 길이길이 그들의 이름을 남기고자 했다.


피 몇 방울을 흘려서 구천의 영혼들을 위로하는 것이 아닌, 그들 모두가 영원히 기록되고 찬양되는 존재가 되는 것. 죽은 사람을 영원히 살게 하는 복수를 택한 매장소. 드라마는 이 과정을 세심하게 그려냄으로써 사람 몇이 죽어나가는 '통쾌한 복수극'을 기대한 나 따위의 뺨을 세차게 치고 갔다. 오히려 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것 같은 저 위태한 남자를 걱정하며, 그를 그리워했던 사람들이 다시 슬퍼할 것을 안타까워하며 보고 있다. 이런 감정, 아내의 유혹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다.

종주님 종주님 우리종주님 / via Twitter.com

랑야방은 비극이다. 극 전반을 지배하는 것은 슬픔이다. 망자에 대한 슬픔, 친우와 자식을 죽게 만든 패도 정치가 판치는 조정에 대한 슬픔, 정의가 죽고 불의가 살아 나라의 동량이랍시고 떠들어대는 세상에 대한 슬픔. 그리고 이 여정의 결말을 알고 있으면서도 힘겹게 한 발짝씩 디디며 나아가야 했던 주인공 '매장소'의 삶을 보며 느끼는 슬픔. 매주 주중 10시 '지난 이야기' 편집 영상이 나가는 순간부터 '다음 이야기'가 끝나는 지점까지 나는 '슬픔'을 맘껏 즐겼다. 때로는 정왕이 매장소가 임수임을 알고 나서 꺼이꺼이 울던 것처럼, 때로는 경예가 자신의 출생의 비밀과 아버지의 악행을 알고 난 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털썩! 무릎을 꿇는 것처럼, 곧 쓰러질 듯한 위태로운 정인을 보고도 물심양면으로 도와야 했던 예황이 눈물을 삼켜야 했던 것처럼.


그리고 이 화려한 비극이 주는 슬픔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가면 갈수록 더 슬퍼지는데 내가 느끼는 개운함은 더 커져갔다. 이걸 보면서 한참 슬퍼하다 보면, 저절로 감정을 쏟고 에너지를 쏟게 되면서 많은 근심을 잊을 수 있었다. 드라마를 보면서 이런 감정을 느낀 건 참 오랜만이라… 요즘따라 내가 희극보다는 비극을 참 좋아한다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다.


암튼! 두 달 동안 마음 바쳐 덕질한 건 이제 끝이 나고! 그동안 미뤄두었던 미드를 다 꺼내봐야 할 터인데! 종주님의 뜻 모를 웃음이 자꾸 머리를 맴돌아서 과연 넥스트 스텝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12월 남은 기간의 과제는 이것이 되겠다.


ps. 더 좋았던 건 마음 바쳐 덕질하는데 외롭지 않았다는 거. 랑야방 함께 달린 트친 여러분 우리 남은 이틀 동안 파이팅해요.


ps 2. 정생이 나오는 랑야방 2 볼 때는 중국어 자막의 반은 이해하면서 보고 싶다 으헝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