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말 좀 들어
(최초 작성: 2019.3.8)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드디어 캡틴이 왔다. 우리의 영웅, <캡틴 마블>이.
역시나 사람들은 “서사”의 부족함을 지적하고, “정치적 올바름을 강요한다”라고 불평하며, 캡틴 마블이 내뿜는 강력한 여성의 메시지를 두려워하고 거부한다.
불평하는 말이 많아서 눈과 귀를 닫고 싶은데 그건 잘 안되고, 트위터에서 팬들끼리 재잘재잘 떠드는 것만으로는 메시지의 파급에 한계가 있을 것 같아서, 블로그에 두서없이 적어본다. 물론 이건 일개 팬의 의견이며, 캡틴은 길고 긴 설명 대신 한 방 쏘는 걸로 해결할 것이다. 이럴 때 정말 포톤 블래스트가 갖고 싶다.
자율적이고 쿨한 여성이 두려운가
캐럴 댄버스는 자율적이다. 언제나 자유를 추구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을 추구한다. 스피드와 운동을 사랑하고, 힘들고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으며, 자신에 대한 정의가 자신의 성별에 국한되지 않길 바랐다. 정정당당하게 훈련하고 경쟁하고 임무를 수행한다. 캐럴은 “남자가 어쩌고”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더 높이, 더 멀리, 더 빠르게” 날고자 하고, 자신이 옳다고 행동하는 일을 위해 위험을 감수한다. 손에서 포톤 블래스트를 뿜을 때도 크리 족의 영광을 위해 싸우는 전사로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자 한다.
인간은 자신을 규정하는 어떤 것이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캐럴은 공군 파일럿, 고귀한 영웅 전사, 지구를 지키는 히어로를 선택했다. 그는 자신을 믿어주는 친구의 정신적 버팀목, 자신을 ‘이모’라 부르는 꼬마 소녀의 롤모델,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준 과학자를 따르고 지키는 든든한 동료다. 캐럴은 자신을 속박하고 규정하려는 이들을 멀리하고 있는 그대로 봐주는 사람들을 마음에 들인다. 그게 어쩌다 보니 여성이 많은 것뿐이다. 남성도 당연히 있다. 퓨리나 탈로스는 캐럴의 능력을 제한하려 하지 않는다. 인간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주고 틀에 가두려는 인물을 배척하는 건 당연하다. 그게 뭐 잘못된 일인가?
캐럴은 솔직하다.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악몽 속 기억의 주인공을 궁금해하고, 잃어버린 기억을 추적하며 진실과 거짓이 바뀌는 혼돈을 경험하는 동안, 캐럴은 자신이 심정을 얼굴 표정과 행동에 그대로 드러낸다. 블랙박스 녹음 내용을 들으며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는 걸 경험한 캐럴은 눈물을 흘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말한다. 상관이자 멘토와 대련하며 농담을 던지고, 포톤 블래스트로 묶인 손을 풀었을 때 손뼉을 치고, 각성 모드로 들어가서 자신이 힘을 컨트롤하지 못할 때도 신난 표정을 짓고, 하늘을 날며 환호한다. 그는 자신의 힘과 능력을 즐기고, 두려움을 숨기지 않으며, 불의에 침묵하지 않으며 소중한 사람들을 지킨다. 캐럴은 멋진 영웅이다. 그가 두려운가?
처음부터 완벽함을 바란다
코믹스는 몰라도 MCU는 <아이언맨> 개봉 때부터 극장 출석체크를 한 사람으로서, 난 지금까지 한 영웅이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을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봤다. 아이언맨의 슈트 마크 번호를 알기 위해선 토니 스타크가 사막 한가운데에서 슈트를 만들 때부터 피터 파커 앞에서 슈트 밖으로 걸어 나오는 모습까지 전~부 다 봤다. 브루클린 뒷골목에서 “하루 종일 할 수도 있어.”라며 깡패들의 주먹을 다 받아낸 스티브 로저스가 시베리아에서 아이언맨에게 방패를 버리는 그 순간까지 기억한다. 토르가 지구와 우주로 몇 번이나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도 다 지켜봤다.
<블랙 팬서>와 <캡틴 마블>은 마블 역사상 가장 엄격한 잣대로 평가받는다. 몇 년 간 수많은 영화에 등장해 이미 저 멀리 가버린 다른 히어로 캐릭터들에 들이대는 기준을 여기에 적용한다. 그에 못 미치면 비판하고, 피씨함을 탓하며, 그딴 거 신경 쓸 때 재미에 치중하라고 한다. <아이언맨 3>가 재미있는 건 첫 2편과 뉴욕 침공을 겪은 토니 스타크를 우리가 알기 때문이고,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가 재미있는 건 그 수많은 인물들 사이의 역사를 꿰뚫기 때문이다. <토르: 라그나로크>가 재미있는 건 타이카 와이티티 특유의 개그도 있지만 1, 2편과 어벤져스로 구축한 역사를 이래저래 잘 써먹기 때문이다. 그만큼 기준이 높아진 상황에서 새로운 세계와 시스템을 소개해야 하는 <블랙 팬서>와 <캡틴 마블>엔 유달리 가혹하다. 멀티버스를 소개한 <닥터 스트레인지>는 사실 블팬이나 캡마만큼 재미있게 보진 않았는데, 난 별다른 불평 안 하잖아요.
그러면 이렇게 반응하더라. “요란을 떠니까.” 흑인 영웅이 온다, 여성 영웅이 온다. 그렇게 기대하게 만들고 그러니까, 좀 적당히 하지. OMG, 이걸 생각해봤나 모르겠다. 첫째, 영화 마케팅이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둘째, 당신이 그 메시지의 엔드에 있는 사람이란 보장이 있는지. 셋째, 왜 새로운 영웅이 오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면 안 되는지. 넷째, 마블 영화가 당신 덕질 인생에서 신성불가침의 존재가 된 것인지.
캐럴은 당신의 자존심을 짓밟기엔 너무 바쁘다
영웅에 성별이 뭐가 중요하냐. 그럴 수도 있다. 캡틴 마블은 쿨한 조종사이고, 손에서 불빛을 쏘며, 우주선 하나는 몸으로 뚫어버릴 존재다. 남자여도 괜찮다. 반대로 아이언맨이나 캡틴 아메리카가 여자여도 괜찮지 않나? 스티븐은 선하고 고결한 마음씨를 가진 인물이지만, 페기 카터가 스티븐보다 자격이 넘치지 않을까 생각도 한다. 핌 박사가 스콧 랭을 앤트맨으로 고르기 전에 호프가 자신도 할 수 있다는 말을 몇 번이나 무시했다. 페기는 결국 쉴드를 창립했고, 호프는 날개 달린 와스프가 되었지만 처음부터 인정받은 이가 아니라는 것은 언제나 상처다.
<캡틴 마블>은 한계를 뛰어넘어 최초를 섭렵함 여성이 나온다. 남자에게 줬으니 이제 여자에게 준다는 시혜적 태도가 아닌 오로지 여성 영웅에만 집중한다. 남성 영웅의 탄생 스토리에 전혀 영향받지 않은 독자적 오리진 스토리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남성을 적으로 돌리지 않는다. 그저 인간의 본능대로 자신의 한 팔을 묶어버린 사람들을 멀리했고, 어쩌다 보니 남자가 많을 뿐이다.
정말 미안하지만 <캡틴 마블>은 당신의 힘을 뺏고 자존심을 꺾으러 오지 않았다. 캐럴 언니는 그런 짓 하기에 너무 바쁘다. 그 사이에 소녀들 한 명이라도 더 손을 잡고 일으켜줘야 한다.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를 좋아한다고 하면 “걔네는 남자고 넌 여자라 안돼.”라는 말을 들었거나 “잘생기고 돈 많아서 좋아하는 것.”이란 비웃음을 경험했던 여자아이들이 처음으로 우러러볼 영웅이 되는 게 더 중요하다.
언젠가 브리 라슨이 이야기한 “<시간의 주름>을 본 남성 평론가의 의견은 궁금하지 않다.”라는 말에 공감한다. 나는 이 영화를 본 초등학교 2~3학년 소녀들이, 점점 사회가 전파하는 “여자는 이래야지 저래야지”라는 메시지를 익히는 아이들이 이 영화를 통해 세상에 더 많은 선택지가 있음을 알게 될지가 더 궁금하다. 캡틴 마블이 여자들의 히어로가 되는 게 못마땅하면 그냥 신경 끄고 원래 하던 것처럼 백인 남성 히어로를 좋아하면 되겠다.
다양함과 정치적 올바름이 재미다
<스타워즈> 팬덤에서 <라스트 제다이>를 한없이 깎아내리며 한 말, “피씨함이 작품을 망쳤다.” 기존의 권위를 부정하고, 신성한 힘을 누리는 데 특권과 자격이 따로 주어지지 않다고 주장하며, 한없이 정의로워야 할 루크 스카이워커를 이상한 노인네로 만들었으며, 제다이 오더를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로 만들었다. 기존의 설정을 모두 박살 낸 다음 <스타워즈>에 무엇이 남는지, 그동안 스타워즈에 쏟아부은 팬들의 애정은 어떻게 할 것인지 많이 따진다. 나야 스타워즈 팬도 아니고 이 동네 싸움에 참전하고픈 마음은 전혀 없다. 그럴 시간에 스스로 틀을 깨기 위해 움직이는 다른 프랜차이즈를 찾아가겠다.
<캡틴 마블>에 피씨함을 논하는 것만큼 의미 없는 게 있을까?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라고 보면 된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기회를 좀처럼 얻지 못한 여성, 인종 차별을 몸소 뚫어야 했던 흑인, 불복종했다는 이유로 집을 잃은 채 떠도는 외계인 난민들이 자신들의 힘을 합쳐 지구를 지킨다. 그리고 능력이 있으니까 잘 지켰다. 그동안 영웅 서사에서 주변인으로 밀려난 이들이 이제 한 번 주인공이 되어 봤는데, “영웅 서사의 A에서 Z를 충실히 따르지 않아서” 또는 “너무 충실히 따라서” 저평가되는 건 말이 안 된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고, 이 정도면 부족해도 감사할 만한 베리에이션이다. 더 이상 흥미롭지 않다면 그건 슈퍼히어로 영웅 서사가 너무 흔해졌기 때문이며, 여성 영웅보다 다른 캐릭터를 우선시한 마블을 탓해야지 <캡틴 마블> 자체를 탓해선 안 된다.
영화의 정치적 올바름을 따지기 전에 우리의 시각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이 사회에서 보장하는 자원과 기회를 많이 누릴 수 있는 집단인가? 그 기회가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만큼 나의 생득적 조건에 따라 주어지는가? 나와 비슷하게, 아니면 더 많이 노력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바꿀 수 없는 조건 때문에 기회를 얻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았는가? 그래서 나는 지배적 시각을 갖고 있는가, 그것이 내가 영화를 보는 관점에 투영되는가? 나와 다르기 때문에 기회를 얻지 못하는 이들을 나는 무엇으로 바라보는가? 내 세계에 장식이 될 대상? 아니면 함께 살아야 할 동료?
영화의 피씨함은 그동안 지배적 메시지를 앞장서서 말한 이들에게 마이크를 다른 이들과 함께 쓰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당신을 나쁜 놈으로 만드는 악마의 세팅도 아니다. 인종 차별을 하지 말자는 것은 모두를 동일한 인격으로 대접하자는 것이지 유색인종과 백인의 위치를 바꾸자는 게 아니다. 성 평등도 남녀 상관없이 한 사람이 인격체로서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도록 보장하자는 것이다. 영화가 메시지를 전하고 재미를 전하는 매체로서 다양한 목소리에서 새로운 재미를 발굴하고 끊임없이 발전하는 과정이 “재미”를 해치는 짓이라 보는가? 그런 말을 하는 자신이 발전을 잘못 정의하고 있지 않은지, 그동안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들에게 마이크가 돌아가선 안 된다고 생각하고 그들에게 “어딜 감히”라 외치고 싶은 게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아이들에게
12세 관람가는 보호자와 함께 아이들도 관람할 수 있다고 알고 있다. 난 이 영화를 여자아이들도 남자아이들도 모두 봤으면 좋겠다. 여자아이들에겐 캐럴 댄버스 같은 멋진 영웅이 될 수도 있고, 마리아 램보처럼 멋진 조종사가 되거나 마-벨처럼 약자를 위해 헌신하는 과학자가 될 스도 있다고 말해주면 좋겠다. 남자아이들에겐 아메리카나 아이언맨만큼 멋진 슈퍼히어로가 여자일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여자아이들도 영웅이 될 수 있으며, 둘은 좋은 동료이자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지구는 결국 남자가, 또는 여자가 혼자 지키는 게 아니라 서로 힘을 합쳐 같이 지키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