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좋은 원작의 완벽한 낭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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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보고 왔습니다. 그동안 나온 기사 때문에 설마설마 싶었지만 이렇게 절 숙연하게 만들 줄이야...
제가 가지고 있는 DC코믹스에 대한 지식은 매우 일천합니다.
1. 일단 코믹스를 본 적은 없습니다.
2. 슈퍼맨의 경우 드라마 '로이스&클락', '스몰빌', 그리고 '맨 오브 스틸'로 접했습니다. 맨옵스는 스트리밍 서비스로 봤습니다.
3. 배트맨의 경우 90년대 개봉했던 '배트맨 포에버', '배트맨 & 로빈', 그리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3부작'을 봤습니다.
4. 현재 The CW와 CBS를 통해 방영중인 DC TV유니버스의 드라마를 재미있게 시청중입니다. '애로우', '플래시', '슈퍼걸', '레전드 오브 투모로우' 등이 있습니다.
핵심 원작에 대한 레퍼런스가 없기 때문에 영화가 원작에 얼마나 충실하였는가에 대해서는 비교가 불가능합니다. 배트맨과 슈퍼맨도 버전이 여러가지라 어떤 것에 맞춰서 풀어냈는지는 코믹스 팬들이 더 잘 알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쓰고 싶은(이라 쓰고 '불평하고 싶은'이라 읽습니다) 것은 수십 년의 역사를 가진, 디씨 유니버스를 대표하는 두 슈퍼히어로, '슈퍼히어로'라고 하면 바로 떠오르는 배트맨과 슈퍼맨을 근본없이 치고박고 싸우게 만든 영화에 대한 것입니다.
일단 이 영화에는 목적도 없고 스토리도 없습니다. 그저 두 슈퍼히어로가 충돌했다는 것일 뿐. 물론 두 슈퍼히어로가 왜 싸우는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초인적인 힘'과 '선한 의도'는 어디까지 함께 갈 수 있을 것인가. 사람들을 죽이고 삶을 파괴하는 악당을 슈퍼맨이 무시무시한 힘으로 누르면서 생기는 부수적 피해. 그 의도가 선하든 선하지 않든 힘은 반드시 피해를 남기고, 영웅에게 이기적인 마음이 자라나면 누군가 반드시 피해를 보고, 결국 영웅과 악당의 경계는 종이 두께만큼 얇은 선 하나일 뿐이라는... 적어놓고 보니 거창하고, 굉장히 심오하네요. 하지만, 이런 고민이 영화에 잘 표현되어 있는가? 솔직히 이 글을 쓰기 위해 처음으로 영화 정보를 검색하고(스포일러를 피하려고 일부러 안 봤습니다) 배급사에서 배포한 간략 줄거리를 보고 나서야 이걸 캐치해 냈습니다. 2시간 30분 동안 치고박고 싸우는 씬만 집어넣느라 정작 중요한 주제의식이 중간부터 실종되어 버린 점.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분노할 만 합니다.
두번째로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부족합니다. 일단 배트맨은 그동안 봐 왔던 수많은 배트맨과는 또 다른 배트맨인데(원작 코믹스에 가장 가깝다 라는 평가는 봤습니다), 어릴 적 부모님을 잃고, 스스로 자경단이 되어 고담시의 정의를 실현해온 배트맨이 왜 슈퍼맨을 경계하고 없애려 했는지에 대한 설명을 프롤로그에 나오는 몇 씬으로 설명할 수 있나요? 대체 이런 자신감은 어디에서 온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슈퍼맨은 그나마 맨옵스가 있습니다. 맨옵스를 보면 그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힘을 찾아가는 과정을 (재미는 없긴 하지만)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배트맨의 레퍼런스는 어디에 있나요? '우리모두 배트맨은 알고 있으니까' 그냥 퉁치라는 건가요? 마사 웨인이 총에 맞으며 끊어진 목걸이에서 진주가 떨어지는 것으로 배트맨이 가진 트라우마가 설명될 수 있나요? 전 영알못이라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캐릭터 해석에 대한 연장선상으로, 슈퍼맨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어떤 일이든 하는 영웅으로 그려지면서, 자연스럽게 로이스 레인은 '이 시대 민폐의 아이콘'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자길 위해서라면 우주 끝까지 갈 수도 있는 남자친구를 말리지 못하는 무력감. 로이스 레인에게 왜 그렇게 잔인한 굴레를 씌우는지 모르겠습니다. 슈퍼맨이 사람들을 돕고 정의를 실현하려는 마음을 가르친 사람들은 그의 가족들과 로이스인데, 그것을 가로막는 사람도 가족과 로이스로 그려집니다. 슈퍼맨 캐릭터 해석을 이렇게 잡아놓고 밀고 나가는 일관성을 칭찬해줘야 하는 건가요, 초인적인 힘을 남용하고 오용하는 것처럼 그려지는 상황을 비난해야 하는 건가요? 로이스에 대한 해석도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가진 초인적인 능력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는 걸 가르친 사람을,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위기에 빠뜨리는 민폐 캐릭터로 전락시켜야 했었나요? 그리고 전투하는 데 중간에 뽀뽀는 왜 하는 건가요? 니들 둘은 저기서 사건사고 벌어지는 건 눈에 안 들어오는 거냐?
세번째, 앞에서 이 둘이 왜 싸우는지에 대한 설명이나 왜 이런 사건이 발생했는지에 대한 목적이 불분명하다고 언급했는데, 그것만큼 황당한 지점은 두 사람의 갈등이 갑자기 풀려버리는 순간입니다(스포일러라 자세한 내용은 적지 않습니다). 두 캐릭터의 갈등을 일시에 해소하는 장치라니... 그 시간을 들여서 쌓아놨을 만한 이야기가 엄청나게 좋았다고 해도 이 장치의 허무함에 비틀거릴 만합니다. 이동진 평론가가 이에 대해서 정말 멋진 한줄평을 해놨는데, 이에 백번천번 공감하게 됩니다. 아우 진짜...
네번째, 영화가 '너무' 깁니다. 2시간 30분이 물리적으로도 긴 시간이긴 하지만... '인터스텔라'와 '곤 걸'을 연달아 보는 고행도 했던 몸이고, 요즘 영화 2시간 30분이면 길긴 하지만 그렇게 길지도 않은 거라 별 무리 없겠지 생각하며 봤습니다. 그런데 이건 너무나너무나 깁니다. 좀 오래 본 것 같은데 이제 겨우 1시간 넘었더군요. 어떤 스토리라도 기승전결은 있기 마련입니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방식은 산 모양의 그래프를 자면서도 그릴 수 있을 만큼 외웠던 거고요. 그러니 스토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가는 동안 긴장감과 흥미진진함을 구축해가는 과정, 인물 간 갈등, 설명에 대한 것들이 드러나는 걸 기대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앞부분이 하나도 흥미진진하지 않으니까 어느 순간 스토리에도 관심이 없고, 뒤에 물량을 쏟아부어 구성한 액션씬에서도 감흥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실험적 이야기 구성을 꿈꾸는 게 아니라면 이야기는 관객의 기대에 충실히 부응하면서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건드리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배웠습니다. 대체 이렇게 시종일관 사람을 지치게 만들어서 결정적인 순간에는 하나도 집중할 수 없게 만드는 작품에 누가 오케이를 한 건가요?
무조건 까기는 그렇죠? 이 영화에도 좋은 점은 있습니다. 배우들은 정말 좋았습니다. 각자 주어진 지점에서 최대한의 연기를 해냈으니까요. 헨리 카빌은 맨옵스에서 가진 한없이 무거운 짐을 조금 덜어내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슈퍼맨을 연기할 때나, 평범한 기자 클락 켄트를 연기할 때나 여전히 잘생겼습니다(응?). 캐스팅으로 모두를 충격과 공포의 도가니에 빠뜨렸던 벤 에플렉의 배트맨은, 의외로 나쁘지 않았습니다. 물론 브루스 웨인일 때가 배트맨 수트를 입었을 때보다는 훨씬 더 멋지지만요. 제시 아이젠버그의 렉스 루터는 제가 기억하는 렉스 루터 중 가장 좋습니다. 제시 아이젠버그가 할 수 있는 나쁘고 비열하고 상처많은 연기의 집합체라고 할까요. 캐릭터는 전형적인 느낌이었지만 제시의 연기로 많이 커버된 느낌이었습니다. 에이미 아담스는 원래 연기를 잘 하지만, 맨옵스의 로이스 레인보다 좀 더 좋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만족하지 못한 배우도 있습니다. 아직도 갤 가돗이 왜 원더우먼에 캐스팅된 건지 의문이긴 하거든요. 배우를 둘러싼 이야기들(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옹호 발언)을 차치하고, 제 눈에는 매력이 없습니다. 예쁘고 키크고 몸매도 좋은 건 인정하는데, 두 시간 동안 관객들의 시선을 영화에 붙잡아 둘 만한 매력이 있는 배우는 아니었습니다. 한 번 시선은 가지만 두 시간 쳐다보기는 질리는 느낌. 저런 배우가 주연이 되어 2시간 동안 영화를 이끌어 나갈 수 있을까요? 원더우먼 단독 시리즈가 걱정되기 시작했습니다.
마블의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경계하면서 런칭한 DC의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좋은 스타트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영화는 너무나 수많은 역할을 해내야 했는데, 제대로 해낸 게 몇 개 없는 상황이죠. '원더우먼'의 등장이나 클립으로 만난 플래시와 아쿠아맨 모두 반갑다는 느낌 보다는 '아... 쟤네들...'이란 느낌이 더 강했고요. 후반부 액션씬에서 원더우먼이 큰 역할을 해 주긴 하지만 이미 지칠 만큼 지친 상황에서 보게 돼서 큰 임팩트를 느끼진 못했습니다. 원래 디씨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런칭할 때 플래시와 아쿠아맨은 조금 기대하고 있었는데, 오늘 보고 나서 기대감이 더 커진다거나 하는 건 없었습니다. 원래 기대감이 커져야 하는데 말이죠...
영화를 다 보고 난후, 마블에는 있고 디씨에는 없는 게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최소한 씨네마틱 유니버스 버전에서 마블에 있고 디씨에 없는 결정적인 요소는 케빈 파이기입니다. 성공한 덕후 케빈 파이기가 아니라, 시리즈 전체에 대한 블루프린트를 만들고, 각 영화를 효과적으로 배치하고, 이를 위해 각 영화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종합적인 시각에서 관장할 프로듀서 말이죠. 케빈 파이기는 감독과 작가를 끊임없이 교체하면서도 시리즈의 일관성을 유지해 오고 있습니다. 창작의 자유를 빼앗는 처사라고 말은 많지만, 한두푼도 아니고 몇백만 달러의 예산을 들여 몇 년간 작업하는 블록버스터 영화를 '잘 만들어서 수익을 얻으려는' 스튜디오의 판단을 무조건 비난하고 싶진 않습니다. 오히려 디씨 유니버스에는 케빈 파이기 같은 존재가 필요할 겁니다. 감독들이 가려고 하는 방향에 응원도 해주지면 때로는 '이건 아니다', '공감이 안 된다'라고 말할 수 있고, 제작비 대비 좋은 퀄리티를 뽑아내기 위해 관리 감독하는 사람 말입니다. 조지 밀러 감독이 '매드 맥스'를 찍을 때 제작비를 초과해도 별 말 안 했다고 하지만... 모든 감독이 조지 밀러는 아니잖아요. 잭 스나이더는 '왓치맨' 이후 점점 박한 평가를 받고 있고, 심지어 제 2의 마이클 베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습니다. 물론 표면적으로 프로듀서가 앞에 드러나는 것이 안 좋게 보일 수도 있지만, 최소한 제가 본 이 영화에는 프로듀서의 존재감 따위는 소금 한 꼬집보다 못했고 1부터 100까지 '나는 잭스나이더다' 느낌이었어요. 그리고 장담하는데, 썩 좋은 느낌은 아닙니다.
암튼 제 한줄 평가는 다음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