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도 가지 못한 영화
평소의 나라면 절대 선택하지 않았을 영화, 아수라를 봤다.
정우성, 황정민, 곽도원, 주지훈, 정만식. 그리고 여기 포함되지 않았지만 윤제문, 김원해 등등 대한민국의 (상)남자배우들은 다 동원했다.
이런 남자들 가득한 영화에 한 사람쯤 등장할법한 팜므파탈도 없다. 오로지 남자들만으로 채워지는 게 당연한 듯한, 권력과 남성에 대한 이야기라면 관습적으로 나올 성적인 내용은 없고 오로지 피와 폭력으로 영화 전체를 가득 채운다.
하지만 영화는 기대, 아니 우려한 만큼 잔인하진 않았다. 물론 피칠갑이긴 했지만 "잔인하다, 폭력적이다"를 마케팅 전면에 내세울 만큼 그 씬들이 섬뜩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이런 영화가 너무 싫어서 눈을 가리고 보긴 하지만, 하드...고어?; 그 말에 겁을 먹어서 못 볼 정도눈 아니다.
대신 복병은 따로 있다. 바로 스토리. 화면을 시뻘겋게 물들여도 덜컹거리는 스토리는 가려지지 않는다. 특히 한도경 (정우성)과 문성모 (주지훈)의 관계 변화, 문성모의 캐릭터 변화, 김차인 (곽도원)과 도창학 (정만식)의 항상 좋지만은 않은 관계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갑자기 쑤욱 나가버리거나, 시간 없으니까 이 부분은 넘어가자 느낌.
스토리의 덜컹거림이 느껴지는 건 애초에 너무 많은 욕심을 부렸기 때문일 것이다. 홍보는 5명만 뛰는데 (물론 무도에는 김원해도 함께 출연했지만) 이들뿐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중심인물이다. 그리고 욕망과 악함를 기본 장착하고 날뛰는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시간을 할애한다. 그것이 감독이 의도한 "아수라"의 모습일지는 몰라도 영화에 너무나 많은 게 들어가는 결과를 낳았다.
이 영화에서 좋았던 점은 기술적인 면이다. 촬영, 조명, 장소 로케이션, 스튜디오의 미술, 분장, 스턴트, 음악 등 수많은 부분에서 잘한다, 공들였다 느낌이 물씬 난다. 특히 음악에 관심이 있던 저는 스코어도 그렇지만 삽입된 곡들도 적절하다. (마지막 장면에 흐르던 로버트 플랜트의 Satan Your Kingdom Must Come Down이 나오는 순간에는 소름이 오도도 돋았다.) 그래서 이 작품이 더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 정도의 기술, 그리고 이 기술을 쓸 만한 자본을 끌어들인 영화가 맛없는 잡탕찌개가 될 줄이야... ㅠㅠ
반면 이 영화에서 기대한 것에 못 미친 건 배우들의 연기였다. 정우성... 한도경 역을 하기에 너무 착한데, 원래의 선함을 완전히 놓고 악으로 걸어 들어가는 한도경이 될 만큼 처절하지 않았다. 주지훈도 캐릭터에 빈 공간을 잘 채워 넣을 만큼의 연기를 보여주지 않았다. 황정민과 곽도원은 딱 배우들에게 기대하는 캐릭터 해석과 연기를 보여준다. 물론 그 수준이 높긴 한데, 어디서 본듯한 모습이 자꾸 나오는 거죠. 정만식은 기대보다 존재감이 없어서 아쉬웠다. 캐릭터를 가장 잘 소화해 낸 사람은... 김원해? 정말 짝대기처럼 마약에 미쳐서 나쁜 일은 다 해대는 인간처럼 보였다.
영화가 조금만 차가웠다면, 조금만 건조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처음부터 너무 뜨겁고, 처음부터 "사나이! 으~리!" 느낌이라 질렸는데, 마지막에 모두가 한데 뒤엉켜 생사를 건 싸움을 벌이는 순간에도 그걸 놓지 못했다. 조금만 차갑고 건조하게 그렸다면 순간순간 뿜어 나오는 "사나이" 감성이 영화적 예술로 승화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렇게 뜨겁게 갈 거라면, 차라리 정말 배역 하나하나에 애정을 주고 그려내고 싶다면 2시간 영화가 아니라 50분×6부작 정도의 19금 드라마로 만드는 게 나았을 것 같다. 이 영화를 보고 "미국 씨네맥스 스타일이네." 싶었기 때문. 잔인하고 피가 낭자하고 등장인물마다 스토리를 만들려고 하는 건... 그건 드라마가 더 효과적은 포맷일 것이다. 안 그러면 인물이든 사건이든 많은 걸 담으려 한 욕심를 버려야 했는데... (절레절레) 등장인물 몇몇의 비중을 줄이고, 검사vs한도경vs시장 세 구도만으로도 많은 이야기가 가능할 거다. 사실 이것도 많다.;
p.s. 이 영화를 보고 나니까 보고 싶은 영화가 몇 가지 생겼다. 일단 이 영화와 비교하는 데 가장 많이 언급되는 [신세계], 그리고 좀 생뚱맞긴 하지만 데이비드 크로넨버그가 만든 [폭력의 역사]. 가능하면 [황해]도 도전해 보려 한다. 폭력과 피가 낭자한 영화를 싫어하기 때문에, 엄청난 도전이 될 듯하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