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공부의 압박을 느끼던 학창 시절, 나는 우연히 보게 된 일본 영화 <배틀 로열 (Battle Royale)>과 그 원작 소설에 푹 빠져버렸다. 사회체계니 법, 질서, 규율 등을 무시하고 다양한 범죄를 저지르며 막 나가는 청소년들을 제압하고자 정부에서 고등학생들끼리 서로 무기를 겨누게 만드는 것이 “배틀 로열”의 설정으로, 게임처럼 규칙과 시간제한이 있고 따르지 않을 시 정부(주최자)에게 죽임 당한다. (미국 소설이자 영화화된 <헝거게임> 또한 <배틀 로열>과 많이 비교됐다.)지금 생각해보면 소설이든 영화든, <배틀 로열>을 미성년자인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이 좀 의아하긴 하다.
하지만 그 당시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 선 채 입시를 앞두고 있던 내게는 <배틀 로열>의 폭력적이고 공포스러운, 순식간에 생과 사를 가르는 급박한 상황과 각 인물의 이야기는 기묘한 희열과 해방감을 주었다. 통제 불가능이 된 잔인하고 무례한 청소년들을 제압하고자 어른들이 제멋대로 강요하는 일종의 박멸 작업, 그리고 적자생존으로서의 “배틀 로열”은 시험을 통해 끊임없는 전투를 강요받고 승자와 패자를 가려내는 학교, 입시 시스템과 비슷해 보였다. 잔혹한 청소년과 잔인한 어른 중 그 누구의 편도 쉽게 들 수 없다는 것이 어찌 보면 그 이야기의 매력이었다.
넷플릭스 <아리스 인 보더랜드>라는 따끈따끈한 신작 시리즈는 내가 오래전에 봤던 <배틀 로열>을 떠올리게끔 했다.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급박함, 목숨 건 방탈출 게임을 연상시키는 순발력과 추리력, 절로 눈을 질끈 감게 만드는 잔혹함, 그리고 나이와 성별을 떠나 인간을 무서운 존재로 표현하는 것까지 닮아있었다.
♧보더랜드(Borderland)의 의미
<아리스 인 보더랜드>의 원작은 <임종(今際)의 나라의 앨리스>라는 제목의 일본 만화라고 한다. 그런데 왜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 영문 제목에서 “보더랜드” (Borderland), 즉, “경계지”가 되었을까?
일단 현재 <아리스 인 보더랜드>는 시즌 1에서 결론이 나지 않아 원작의 결말을 검색해본 나는 원제가 스포일러라서 그런 것 같다. 어쩌면 결말을 드라마에서 바꿀 예정이라 그런지도 모른다.
게다가 <아리스 인 보더랜드>라는 제목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Alice in Wonderland)>를 연상시킨다. 주인공이 남자가 되긴 했지만 “앨리스”의 일본 표기법인 “아리스”라는 이름과 현실과 다른 환상의 세계를 뜻하는 “원더랜드”는 “보더랜드”가 되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더욱 극명하게 드러낸다. 실제로 시리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트럼프 카드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주요 상징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는 쏟아지는 트럼프들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간다.)
더 중요하게는, “보더랜드”가 주인공의 가치관과 정체성을 규명하게 되는 “경계지”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주인공이 원작에서는 고등학생이라는데 이 시리즈에서는 이십 대 초중반(스물네 살)의 청년으로 나온다. 원작은 못 봤지만, 시리즈에서는 실로 여러 가지의 “경계”가 제시되고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경계”라는 것이 생각만큼 깔끔하게 두 영역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사실상 경계라는 것 자체가 두 가지 영역 또는 사고를 분리하는 지점이라는 것에서 이미 복합하고 혼란스러운 곳이다. 그런 의미에서 법적 나이로 나뉘는 청소년과 어른의 간편한 듯한 숫자적 경계보다, 법적으로는 성인이지만 아직 사회 속에서 애매한 역할을 맡고 있는 이십 대 초반의 주인공이 더 복잡하고 흥미로운 것 같다. 그 복잡함을 풀어가야 하는 장소로서, “보더랜드”는 적합하고 의미심장한 뜻을 지니게 된다.
시리즈로 돌아가자면, 주인공인 아리스는 이십 대 초중반의 남자다. 타인이 봤을 때 학생이거나 사회인이어야 하는 시기에 오직 게임에만 집착하며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은둔형 외톨이로 처음 등장한다. (이는 한국 웹툰이 원작인 넷플릭스의 또 다른 신작, <스위트홈> 또한 그렇다. 요즘 은둔형 외톨이가 주인공으로 많이 등장하는 것은 그만큼 개인이 타인이나 사회와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에 복합적인 문제와 어려움이 많다는 것을 반영하는 게 아닌가 싶다.)
아리스는 제대로 사회의 일원이 되라며 한심해하는 아버지, 형제의 권유와 압박에도 꿈쩍 않고 사회인이 되는 것을 강렬히 거부한다. 똑똑한 머리에도 불구하고 대학도 자퇴했다. 아리스가 실제로 맺고 있는 진실된 인간관계는 바(bar)에서 일하며 상사의 여자 친구를 사랑하는 카루베, 그리고 IT계 회사원으로 종교에 빠진 어머니에게 계속 돈을 빼앗기는 세가와, 이렇게 둘 뿐이다. 결국 집을 나가라는 아버지의 소리에 아리스는 친구들과 약속을 잡고, 때마침 각각 심란한 일을 겪은 친구 셋은 번잡한 시부야에서 만나기로 한다.
시부야 @Unsplash
◇ 시부야에서 말달리다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가 바로 이 유명한 시부야 교차로에서 일어난다. 일본 드라마나 만화, 애니메이션에도 종종 등장하는 핫플레이스 시부야는 사방에 있는 횡단보도가 동시에 초록불로 바뀌며 사람들이 바삐 건너가는 도쿄 중심가를 대표하는 장소다.
답답한 각자의 사정을 안고 만난 아리스와 친구들도 이곳을 건너지만, 평범하게 가지 않는다. 갑자기 카루베가 아리스를 목마 태우고 세가와는 옆에서 함께 속도를 맞추며 이 번잡한 곳을 아이들 마냥 웃으면서 달린다. 본인들은 얼핏 즐거워 보일지언정, 어른이 어른을 목마 태우고 실성한 듯 웃으며 달리는 위태로운 모습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끔거린다. 신호등이 다시 빨갛게 바뀌어도 여전히 길 한복판에서 장난을 치는 통에 경찰까지 대동된다. 장난기와 흥분에 취해 노는 고등학생 마냥, 친구 셋은 크게 웃어대며 과장되게 겁에 질린 모습을 연기하며 화장실로 숨어든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정전에, 그대로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 장면에서 사회의 규율과 정상적인 모습을 벗어나 장난을 치고 질서에 위협을 가하는 그들은 어른이면서도 어른이 아니다. (만약, 강남 한복판에서 성인 남자가 다른 성인 남자를 목마 태운 채 인도도 아닌 도로 한복판을 빨간 불에 달리면서 웃고 있다면 여러 가지 의미로 무서울 것 같다.) 여기서는 시부야라는 사람들이 가득한 장소를 통해 사회와 주변의 압박, 그리고 어른답게 정상적으로 살도록 억압받는 사람들 속에서 숨 막히게 살아가는 청년들의 자유로운 피터팬으로의 회귀를 보여주는 것 같다. 동시에, 질서와 안전을 무시하고 어지럽히는 젊은이들이 기존 사회와 그 구성원들에게 얼마나 큰 위협으로 느껴질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 세상이 멸망하면 어디부터 갈 것인가
화장실에서 정전이 일어나고 보더랜드로 차원 이동을 한 뒤, 세 친구가 보여주는 행동이 매우 흥미롭다. 화장실에서 나와 자신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 시부야 거리를 함께 돌아보다가 셋은 결국 흩어진다. 이때, 카루베와 세가와가 결국 가장 먼저 가는 공간은 자신이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던 공간이다. 애인과 함께 바(bar)에서 일하던 카루베는 그곳으로 바로 달려가 그곳에 프러포즈할 때를 위해 숨겨둔 반지를 되찾는다. IT회사에서 일하던 세가와는 당장 회사로 가서 자신의 자리에서 상사가 제게 쓴 포스트잇을 읽으며 자신의 자리가 맞는지 확인한다. 즉, 이 두 공간과 반지와 포스트잇이라는 물건을 통해 이 두 사람은 불안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을 재확인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서 아리스에게는 그런 장소도 물건도 없다는 것이다. 텅 빈 도시를 돌아다니고 거리를 내려다보지만, 당장 목적지가 있는 친구들과는 달리 서둘러 집에 가서 확인해보는 일은 하지 않는다. 즉, 처음 등장할 때처럼 아리스에게는 집이나 가족이라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게 증명된다. 한 군데로 향하지 않는 아리스의 시선 덕분에 시청자는 그와 함께 도쿄 전반의 상태를 알게 되지만, 이러한 아리스의 행동은 곧바로 소중한 사람과, 또는 일상을 많이 보낸 공간을 우선 찾아가는 친구들과는 대조된다. 그런 의미에서 아리스는 친구들에게 갖는 진심을 제외하고는, 딱히 현실에 마음 붙일 장소도 사람도 없었다는 것으로 보인다.
♡ 쓰레기는나일까, 이 세상일까
몇 년 전, 실제로 일본에 놀러 갔을 때 쓰레기 하나 없는 거리가 놀라웠다. 껌 껍질 조각이라도 떨어뜨릴까 죄송할 정도로 길이 깨끗했다. 하지만 <아리스 인 보더랜드> 속에서는 사람들이 사라진 시부야 거리에 뒹구는 대량의 쓰레기를 보여준다. 이는 사람이 없으니 이제는 황무지나 문명 자체가 쓰레기 매립지처럼 되어버린 땅을 보여준 것일 수도 있다. 또는, 사람으로 가득 찬 번잡함 속에 숨어 눈에 띄지 않던 사회의 지저분한 면모를 들춰내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이 아예 없어진 공간은 그 자체로, 그리고 드러난 진실로 인한 그 나름의 공포가 있다. 결국 사람 때문에 무섭고, 사람의 부재가 무섭다. 개인과 타인, 사회의 관계와 그에 따른 부산물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요즘 자기 계발서들을 살펴보면 목표를 위해 게임처럼 접근하라는 말들이 나온다. <아리스 인 보더랜드>에서는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 쳐야만 하는 상황들이 “게임”이라는 이름 하에 계속 나온다. 게임의 규칙으로는 한 번 게임에 참여하면 끝날 때까지 못 빠져나가는 규칙, 규칙을 어기거나 시간 내에 미션을 완수 못하면 게임마스터에 의해 죽임 당하는 규칙, 어떤 게임인지 모르는 상태로 목숨을 걸고 도전해야 하는 규칙, 그리고 게임에서 이겨서 승리를 거둬야 보더랜드에 있을 수 있는 비자를 연장해서 살 수 있는 규칙이 있다. (이 비자가 연장되지 않으면 게임마스터가 죽이기 때문에 게임을 아예 피할 수는 없다.) 이 “게임”이라는 것 자체가 그토록 아리스가 피하려던 사회의 규칙과 닮아있다. 적어도 아리스가 온 힘을 다해 회피하고 산, 사회적인 이유든, 경제적인 이유든, 사회 속 일원으로 살았던 카루베와 세가와의 삶을 닮아있다. 결국, 아리스가 사회 속 일원이 되지 않으려고 빠져든 게임의 세상 또한 사회를 닮아있다는 것이다.
많은 성장물이, 그리고 일본의 많은 콘텐츠가 그러하듯, 이 시리즈 또한 고립되어 있던 개인이 타인과 소통을 통해 유대감을 갖고, 여러 사람을 만나며 사회의 일원이 되고 제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으로 이어지게끔 보여준다. 첫 등장에서 혼자 인터넷 게임을 하던 아리스는 “보더랜드”에서의 팀전을 통해서 생존을 위해서는 여러 사람과 소통하고 연계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희생을 줄이거나 없애기 위해서는 공감과 협동이 필요하다. 첫 등장에서 자신과 친구들밖에 몰랐던 아리스는 이렇게 타인과 교류를 하며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사람은 혼자 살아남을 수도, 살아갈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간다.
하나씩 드러나는 보더랜드의 사람들의 뒷 이야기를 보면 어떠한 이유에서든 대체로 현실 사회에서는 불필요한, 또는 소외된 사람인 경우가 대다수다. 소위 "쓰레기" 또는 "불량품" 대우를 받던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런 대우가 당연해진 삶 속에 자신의 목숨의 가치를 잊던 사람들이 억지로 내던져진 보더랜드의 게임 속에서 살고자 하는 본능을 기억하게 된다. 처음 보더랜드로 넘어왔을 때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쓰레기처럼, 어찌 보면 보더랜드로 넘어온 인물 또한 사회적 시선 또는 자신의 시선으로 "쓰레기"가 된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생과 사를 가르는 게임 속에서 결국은 사는 것 그 자체가 위대한 업적이 된다. 어쩌면 여러 가지 이유로 사회 밖으로 밀려나간 사람들에게 살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발버둥 치며 버티라는 메시지가 담겼는지도 모르겠다.
<아리스 인 보더랜드>는 첫 에피소드부터 심오한 생각들을 자극적으로 보여주며 순식간에 보는 이를 매료시킨다. 어른과 아이의 경계는 어디인가?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의 경계는 어디인가? 나와 타인 사이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경계선에서는 어디까지 허용되는 것일까? 오랜 시간,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상태로 경계지에서 살아야만 하는 개인은 어떻게 변할까? 생과 사의 경계 속에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가? 결국 사람에게는사람밖에 없지만, 가장 큰 위협 또한 (자신을 포함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며 시리즈는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