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해진다는 것

by 글벗

지난 1년 정도는 그림 때문에 설레고 즐겁기만 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 이렇게 큰 기쁨을 주는 걸 왜 몰랐는지, 진작 용기를 내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어쩌면 감탄과 동경의 대상이기만 했던 그림을 나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던 것 같다. 또 바로 앞에 있는 대상에 온전히 몰두하면서 새로운 모양을 발견하게 되는 것도 신기했다. 나뭇가지 하나가 품은 자잘한 선과 굴곡과 색의 변화로 그림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걸 어렴풋이 경험하면서 나는 그리기라는 활동에 매료되었다. 지난 1년은 거의 매일 연필과 붓을 놓지 않고 지냈다. 나는 그림으로, 아니 그림에게 이야기했고, 그림은 고분고분하게 내 얘기를 그저 들어주었다. 그림이 그저 재미있어서 딱 10년 동안만 그림을 그려보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림을 못 그려도 마음이 참 편했다. 망쳐도 아무렇지도 않고, 남편이 교실 뒤에 걸린 초등학생 그림 같다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달 초 한국 방문이 출발 이틀 전에 불발되면서 나는 크게 우울해졌다. 코로나도 원망스러웠고 마냥 화가 나서 누구에게든 화를 내고 싶었다. 그림한테 내 마음을 좀 달래 달라고 조르는 사람처럼 그림만 그려댔다. 어쩌면 나는 그림에게 차근차근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화풀이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림은 나의 화풀이를 다소곳하게 받아주지 않았다. 나의 성급한 스케치와 붓놀림을 그림은 서툴고 탁한 분위기로 돌려주었다. 그리는 동안은 힐링의 시간이었을지 몰라도 이틀 꼬박 공들이 그림이 "망친 그림"으로 짠 나타나는 순간은 약 오르고 좌절스러웠다. 그럴 때 남편이 농담이랍시고 던진 말("앞으로는 그리기 전에 딸에게 좀 물어보고 그려라")에 나는 기분이 몹시 상했다. 기껏 농담했다가 내가 파르르 떨면서 화를 내니까 남편은 어처구니없어했다. 예전에는 그림을 보고 농담을 해도 아무렇지도 않던 아내의 변덕에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림에게 벌컥 화가 났다.


에이, 그림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나 혼자 바보처럼 그림을 짝사랑했나 보다. 늘지도 않는 그림, 이제 그만해야 하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럴 수 없어!

내 마음이 다짜고짜 나에게 소리쳤다.

너는 아직 그림에 대해 진지하게 알아보지 않았잖아. 그림을 향해 멋대로 이야기를 쏟아냈을 뿐, 어떻게 좋은 그림을 만들 수 있는지 배우고 훈련하지 않았으니까,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없는 건 당연한 일 아니니?


썸을 타는 시기의 설렘이 지나가고 더 진지한 관계로 발전하는 연인처럼, 이제 그렇게 그림을 알아가고 있다. 꾸준히 그리겠지만 꾸준히 발전하지는 않겠고, 가끔은 마음에 드는 그림도 있겠지만 대개는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림을 그려서 돈을 벌 가능성이란 매우 희박하겠고 그래서 내가 아티스트라고 말하는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그냥 취미로 그린다고 말하면 아무 고민도 갈등도 없겠지만 그건 솔직한 표현이 아니다. 취미란, 그것 때문에 좌절스럽고, 화난다면 언제든 쉽게 그만둘 수 있는 거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통 그림 생각뿐이라면 취미라는 이름은 너무 가볍다. 그냥 취미도 아니고, 예술가도 아니라면?

"진지한 수채화 애호가"로 해두어야겠다.

위-왼쪽: 올해 1월 첫 그림. 로스 알토스 힐(Los Altos Hills)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길. 북가주는 겨울에 비가 많이 내려서 언덕이 푸릇푸릇하다. 비가 그친 다음 날이어서 맑은 공기를 뚫고 닿은 햇살에 언덕이 형광빛으로 보였다. 원래는 자동차를 스케치해서 넣었었는데, 딸의 의견으로 모페드(Moped, 스쿠터)를 그려 넣었다.

위-오른쪽: 작년 1월 첫 그림. 세 식구가 되어 두 번째로 바닷가를 찾은 날이었다. 코비드가 한창 극성일 때인데 집 근처 해변이 몹시 붐벼서 칼스베드까지 올라갔다.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파도를 보면서, 뛰어다니며 조약돌과 조개껍데기를 찾는 딸을 보면서 마음을 달랬던 날.

아래-왼쪽: 올해 1월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 1월 1일, 집 옆에 있는 사라토가 크릭(Saratoga Creek)을 딸과 함께 걸었다. 이름은 크릭, 개천이지만 1년 내내 말라있다가 겨울에 비가 와야 물이 흐른다. 12월 말까지만 해도 물이 훨씬 많았는데, 올해는 비가 일찍 그쳐서 벌써 바닥까지 다 말랐다.

아래-오른쪽: 작년 1월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 어릴 때 솜사탕 장수 앞에서 기다릴 때 설레던 기분이 떠올라서 몇 개의 레퍼런스 그림을 참고하여 구성한 그림이다. 앞으로도 몇 번은 다시 그리고 싶은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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