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스쳐간 재능의 면면

by 글벗

수채화를 시작하고 재능이라는 말에 대해 종종 생각해 본다. 회사에 취직해서 다니는 것에는 재능이 필요할까? 그러면 매일 뭘 먹을까 생각하고 밥상을 차리고 아이를 키우는 일에는? 의사나 법관이 되는 일에도 재능이 필요하지 않을까? 수많은 직업과 활동 중에서 유독 재능을 결정적 요인으로 생각하는 분야는 예술 분야인 것 같다. 딸이 아빠 따라서 골프 연습장에서 채를 몇 번 휘둘러 본 게 전부인데 학교 골프팀에 도전했을 때 골프팀 코치는 필드에 한 번도 안 나가본 딸아이를 스윙이 대단히 좋고 잠재력이 보인다며 뽑아주었다. 이것을 재능이 있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운동 분야에서 재능은 체격이나 근육 발달 등이 어떤 특정 운동에 적합하다는 식으로 조금 더 세분화된 조건으로 표현되는 것 같다.


어린 시절 피아노를 시작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내가 들은 음악을 악보 없이 칠 수 있었다. 지금도 작지만 어릴 때도 많이 작았는데 조그만 손으로 아무 노래나 치는 게 신기했는지 사람들이 자꾸 쳐보라고 하기도 했다. 교회 반주를 할 때는 인도자가 어떤 키에서 노래를 시작해도 문제없이 반주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피아노를 잘 치지는 않았다. 나는 내가 피아노 치는 소리를 매우 객관적으로 들을 수 있었고 삐걱거리는 연주 소리를 싫어했다. 악보를 보면 즉시 노래를 부를 수 있지만 노래를 전혀 잘 부르지 않는다. 음악을 듣고 마음이 벅차도록 감동하지만 다음에 그 음악을 또 들으면 한 소절도 기억해내지 못한다. 한때 음악에 일렁이는 감정을 재능이라고 생각하고 엄마에게 음대에 보내달라고 떼를 썼던 일이 있다. 엄마는 딸이 넷인데, 딸 넷 예능 시키다가 집안 망할 일 없다면서 딱 잘라서 거절했다. 나는 방바닥을 구르며 울었다. 음악적 재능이 나에게 있는가 없는가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하면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지금은 딱 잘라서 거절한 엄마에게 감사한다.


회사 다닐 때, 그리고 프리랜서로 일할 때, 다른 사람을 인터뷰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엮어내는 일은 잘했다. 많은 분들이 어쩌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그렇게 콕콕 집어내느냐고 칭찬해주셨다. 나는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해서 사람들 이야기를 듣는 걸 진심으로 즐겼고, 그 이야기를 정확하고 그럴듯하고 쓰고 싶다는 열망이 강하게 피어오르곤 했다. 하지만 글재주는 참 부족했다. 내 글은 늘 거칠었다. 브런치라는 온라인 플랫폼에서 요즘 쓰는 글은 더욱 거칠지만 생업으로 글을 쓸 때도 그렇게 잘 쓰지 않았다. 나의 글은 내가 읽고 감동을 얻거나 감탄하거나 평안을 얻거나 눈앞에 생생한 장면이 펼쳐졌던 그런 글과는 거리가 멀었다. 특히 짧은 광고 문구 같은 것을 써야 할 때는 부족한 창의력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함께 팀으로 일하던 디자이너는 자신이 쓴 글을 이렇게 마음에 안 들어하는 에디터는 처음 보았다고 혀를 찼다. 지금 번역을 하는 데 나의 번역문이 슈퍼마켓에 올려진 PB 상품을 닮았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진열대에 올려놓을 정도의 품질은 갖추었지만 맛도 없고 매력도 없으니까. 직장을 그만둔 뒤 글 곁에서 먹고 산 지 20년이 넘었는데 늘 같은 자리에 있으니 글쓰기 얘기만 나오면 꼬리가 슬그머니 내려간다.


재작년에 수채화를 처음 시작했을 때 다른 사람의 그림을 보고 금방 똑같이 그려낼 수 있었다.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그림을 시작했는데도 나는 금방 그림과 친해졌다. 그런데 그 긴 학창 시절, 즉 국민학교 6년, 중학교 3년, 그리고 1학년까지 미술 수업을 했던 고등학교에서 나는 미술로 두각을 나타내는 학생이 아니었다. 내 주위에 앉은 아이들이 대개 나보다 잘 그렸고 나는 얼른 그림을 그리고 딴짓하기에 바빴다. 이제 와서 그림을 가르쳐주시는 선생님이 칭찬을 해주시기도 하니까 나에게 그림이 왜 편한지, 왜 쉽게 그릴 수 있는지 여러 이유를 생각해 봤다.

그림을 직접 그리지는 않았어도 에디터로 일하면서 뛰어난 미술적 감각을 가진 분들을 많이 봐서.

그림 보는 것을 좋아해서 워낙 많이 봐서.

아빠가 대학교 때 그림을 전공했다니까 아빠 닮아서.

어릴 때 서예를 배워서.

그래, 그냥 재능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

(누가 이 글을 보면 내가 정말 잘 그리는 줄 알겠군...)


아니면, 어떤 일을 하는 데 재능이 꼭 필요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그림이 필요한 시간에 그림을 만났고 그렇게 만난 그림을 놓치기 싫어서 자꾸 그려주는 거, 그게 지금 내가 하고 일인 것 같다. 그런데 거기에서 더 욕심을 내고 싶은 만큼 좋아져서 정말 잘하고 싶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재능을 넘어서는 영역이라고 믿는다. 어쩌면 재능이란 사람과 활동을 짝 지워주는 중매쟁이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다음부터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건 두 사람의 노력이지 중매쟁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이 글은 유랑선생 작가님의 글, <꿈은 있지만 재능이 없으면 어떻게 하죠?>를 읽고 떠오른 생각에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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