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벗 Apr 05. 2022

엄마와 큰 딸, 걷고 이야기하고

엄마를 본 지 3년이 채 되지 않지만 나 혼자 엄마를 보러 가기는 처음이었다. 아빠는 방 안에서 온라인 바둑을 두거나 바둑을 두러 기원에 가서 주로 식사 시간에만 나타났고 나도 약속이 거의 없어서 3주 동안 엄마와 온종일 집에서 보내는 날이 많았다. 다행히 엄마는 큰 수술을 하고도 회복이 빨랐다. 엄마 연세에 수술하고서 고생하는 분들을 많이 봐서 크게 걱정했었는데 퇴원 전에 스스로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의지가 대단한 분이다. 


엄마는 말에 굶주린 사람 같았다. TV를 볼 때에도 TV에 출연한 모든 사람들의 정보를 나에게 쉼 없이 이야기했고 다른 사람과 전화 통화를 마치고 나면 내가 본 적도 없는 어떤 가족의 이야기를 시시콜콜 쏟아놓았으며 보행 연습을 위해 아침저녁 산책할 때는 동네 모든 건물의 소유권 이전 역사와 이익 손실 규모를 들려주었다. 단단하게 굳어서 말라버린 속마음을 둘러싼 뽁뽁이 비닐 같은 이야기들을 그냥 들어드렸다. 

"임영웅이 엄마가 임영웅이 데리고 그렇게 고생했댄다... 

"진짜 정동원이 이뻐 죽겠어... 걔 할아버지가 말이야..." 

"저 건물 보이지? 저기 회색 건물. 그게 원래 000이 있던 자리잖아. 부모 죽고서 자식들이 홀딱 팔아치워서 누가 냉큼 주워서 저기다 저걸 올렸지 뭐야. 저기에 지금 월세가 엄청 들어온대."

"그 집 둘째 사위 기억나지? (응... 그런 거 같기도 하고...) 00 교육청 장학사로 갔잖아. 그런데 어쩜 그렇게 아들같이 잘하는지..."

엄마와 대화는 항상 일방성을 기초로 하니까 내가 대꾸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 편하기도 하다. 뽁뽁이 비닐을 비집고 부러움, 후회, 비난이 배어 나와서 안타깝기도 하고 좌절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도 엄마와 이야기하면서 산책하는 순간순간이 아쉬웠다. 하루 5천보에서 8천보 정도 매일 걸었다. 엄마는 꼿꼿하고 당당했지만 늙은 몸을 의지로 지탱하고 있었다. 이제 여든을 바라보는 엄마와 언제 다시 이렇게 걸을 수 있을까. 부러움과 비난을 꼭꼭 싸맨 뽁뽁이 비닐 같은 이야기 사이에 소녀처럼 솜털 같은 마음이 보일 때는 울컥했다. 엄마는 나보다 시력이 훨씬 좋은 건지 흙을 비집고 올라오는 초록이들을 한눈에 알아봤다.

"어머어머, 얘 봐라. 이렇게 추워도 얘는 봄이 온 걸 아네."

산책 중 만난 강아지 이야기도 들려줬다.


며칠 전에 걷는데 개 한 마리가 나를 졸졸 따라오는 거야. 내가 천천히 걸어서 답답할 텐데 굳이 나를 계속 천천히 따라오잖아. 개 인상이 아주 착하게 생겼어. 

"얘, 나 따라오지 마. 나는 너를 데려갈 수 없어."

알아듣는 것 같으면서도 계속 따라오더라고.

"난 너 못 길러. 나는 내 몸 하나 건사하는 것도 힘들고 우리 영감도 너 거둘 수 있는 양반이 아니야. 우리 집에 너 지낼 곳도 없고."

그래도 이놈이 계속 따라오는데 옆에 차는 막 다니고 위험해서 안 되겠더라고. 그래서 동물병원에 갔지.

"선생님, 얘가 나를 계속 따라오는데 얘 좀 맡았다가 동물보호소에 연락해서 데려가라고 할 수 있어요?"

"할머니, 동물병원에서 그런 건 안 해요. 파출소에 가보세요."

안 맡아준다니 어떡해. 파출소로 갔지.

"실례합니다. 얘가 나를 계속 따라와서 동물병원에 갔더니 파출소에 가보래서 이리로 왔어요. 얘가 다른 데를 안 가고 나만 따라오는데 동물보호소에 연락 좀 해주실래요?"

"할머니, 그런 건 뻥 차 버려야지 여기까지 데려오면 어떡해요?"

"아니, 이렇게 따라오는 걸 어떻게 그래요? 그렇지 말고 연락만 좀 해줘요."

파출소 안에서 주머니에 있던 소시지랑 간식을 개한테 줬더니 며칠을 굶었는지 허겁지겁 먹더라고. 들고 다니면 간식을 모두 파출소에 꺼내놓고 말했어.

"얘 배고픈가 봐요. 내가 간식 두고 갈 테니까 동물보호소에서 올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얘한테 좀 주세요. 그럼 꼭 부탁드립니다."

"아이, 알았어요, 할머니. 가보세요."

"정말 꼭 부탁드립니다."

"할머니, 알았다니까. 가보시라고요."


엄마는 요즘도 동네를 다니다가 혹시 그 개가 다시 거리를 헤매고 있지 않나 살핀다고 했다. 늘 엄마와 닮은 점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개를 좋아하는 건 엄마 닮아서 그런가 보다. 


올 때는 마음이 짠해서 엄마에게 전화도 자주 드려야지 생각했는데 미국 돌아와서 딱 두 번 전화드리고 땡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바닥에서도 보이는 빛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