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나는 창문에 매료되었다. 깜깜한 밤에 창에 불이 환하게 켜진 실내가 들여다 보일 때 그 묘한 느낌, 내 방 창문으로 내려다 보이는 강북의 복잡한 동네 풍경, 창가에서 햇빛을 받는 화초의 만족스러운 자태, 창문을 등진 장식품의 까만 실루엣에 끌렸다. 그림을 처음 시작했을 때도 한 동안 창문이 들어간 그림을 많이 그렸다. 비가 내리는 창도, 빗방울이 맺혀있는 창도, 햇빛이 들어오는 창도 그렸다.
어쩌면 나는 늘 외롭고 소통에 목말라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이 공간에 있으면서도 다른 공간을 엿보도록 이어주는 그 신비한 통로를 오래 동경한 걸 보면.
요즘은 창문이 두 공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투명한 유리를 넘어선 존재로 다가온다. 아마 계기는 얼마 전에 갔던 미국 교회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 교회는 본당 정면에 스테인드글라스를 끼운 커다란 창이 있고 바로 바깥에는 나무가 서있다. 크지도 않은 야리야리한 나무인데도 다람쥐가 나무를 얼마나 신나게 뛰어다니는지 퉁퉁한 다람쥐가 나뭇가지를 건너뛸 때는 나무 전체가 휘청거린다.
다람쥐가 나무를 뛰어다니는 모습은 북가주에서 흔하고 흔한 광경이었는데 색유리는 그 흔한 바깥 광경을 실내에 있는 내 눈에 전혀 다른 정서로 전달해 주었다. 그 광경은 자연을, 생명을, 자유를 상징하는 것 같았다.
띄엄띄엄 앉아서 사오십 명, 빠듯하게 앉아도 백 명 남짓 들어갈 정도의 좁은 공간인데도 아늑하면서도 자연을 다 품은 것 같은 느낌이 간지러울 정도로 좋았다.
그때부터인지 모르겠지만 한동안 자기 생각을 가진 창문을 생각했다. 그냥 보여주는 창문이 아니라 바꿔서 보여주는 창문을 말이다. 밖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지 내가 지각하는 사실은 창문이 바꾸어서 보여주는 사실이 아닐까. 만일 저 사진의 색유리를 너머에서 다람쥐가 뛰어놀지 않고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저 창문을 통해 본다면 역시 아름다운 일이라고 인식하지 않을까? 어쩌면 좋은 일일지도 모른단. 바깥세상에는 언제나 요동치는 법인데 창문이 듬직하게 편집해서 보여준다면 그리 나쁠 것도 없다.
내가 보는 미국 사회의 일들을 나는 한국인의 눈으로, 그러한 필터를 통해 해석한다. 바깥세상의 일뿐 아니라 내 신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인식하는 배경에는 언제나 나의 경험과 이미 아는 지식이 있다. 그것이 나의 창문이다. 이 창문은 사물을 더 아름답게도, 더 단순하게도 보이게 한다. 지난달에는 이 창문 이야기를 담은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여러 장 그렸는데 뭔가 마음에 드는 것은 그림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상하다. 하지만 뭔가 이상한 것 같은 이런 그림을 앞으로 계속 그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