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7/3
이번 스페인 여행은 비행기 연착으로 시작했다. 아침 7:20 출발이어서 4시에 알람을 맞춰놓았는데 일어나 보니 2시간 연착 알림이 와 있었다. 결국 프랑크푸르트에서 연결편을 놓쳤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은 냉방이 잘 되지 않아 후덥지근했고 검은 머리 승객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6시간이나 공항에서 기다려야 했지만 덕분에 점심으로 독일 소시지를 줄길 여유가 있었다.
30일 오전 9:30에 바르셀로나에 도착 계획은 이렇게 항공편이 연착되고 연결편을 놓치면서 무산되었고 체크인을 한 시각은 저녁 6시가 넘어서였다. 숙소는 카탈루냐 광장, 산타 카테리나 마켓, 람블라 거리에서 도보 5분 거리였다. 한국으로 친다면 명동, 서울역 광장을 연상시키는 구시가지 중심이었다.
짐을 호텔에 던지다시피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길에는 젊은이들로 미어졌다. 바르셀로나는 9시 무렵에 해가 져서 그 시간에도 환했다. 지금 보니까 첫날 찍은 사진은 이세 장이 전부다. 부근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어두워질 때까지 호텔 주변을 골목골목 걸어 다니는 걸로 첫날 일정을 마무리했다.
첫날 소감을 말하자면, 거의 20시간에 걸쳐 비행기를 두 번 갈아타고 캘리포니아와 시차가 9시간 나는 곳에 왔는데 풍경이 전혀 낯설지 않다는 거였다. 내가 사는 캘리포니아가 스페인 정복자들의 문화가 그대로 보존된 곳이어서 그런지 바르셀로나 구도심의 건물 외관이나 내부 장식이 몹시 눈에 익었다. 또 람블라 거리 풍경은 젊은 날 보았던 명동 거리, 남대문 거리를 다시 보는 듯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거리 가운데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야외 식탁이 놓인 거리가 형성되고 차는 양쪽에 늘어선 건물 앞의 좁은 차도로 다니는 정도였다. 음식이 품질에 비해 가격이 크게 저렴해서 기분이 좋았다. 다만 숙소 선정은 실패였다. 객실 내부는 세련되고 깨끗했으나 숙소가 위치한 라발지구는 편안하게 걸어다닐 수 있는 지역이 아니었다.
7/1
느긋하게 눈떠서 주변 브런치 카페에서 아침을 먹고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은 하루 종일 관광용 2층 버스를 타고 돌아다닐 예정이다.
관광버스는 승차권을 사면 하루나 이틀 동안 주요 관광지 정거장을 도는데 버스에서 웬만큼 설명도 해준다. 또 배차 간격도 5분이 안 되고 보고 싶은 관광지에 내렸다가 다시 탈 수 있어서 주요 도시에 가면 여행 첫날 주로 하는 활동이다. 스페인 하면 건축가 가우디가 대표적이지만 바르셀로나에 머무는 기간이 4일밖에 되지 않아서 따로 가우디 투어를 하지 않았다. 사실 가우디 건축물에 관하여는 이상하게 생긴 건물을 떠올리는 정도밖에 알지 못했다. 먼저 스페인을 여행한 사람들이 가우디 투어가 인상적이라고 말했지만 내가 잘 몰랐기 때문에 와닿지 않았던 조언이다. 단, 먼저 스페인을 여행하던 딸이 성가족성당에 다녀와서 매우 인상 깊은 듯 사진을 보내오는 걸 보고 호기심이 생겨서 관광버스를 타고 다니다가 성가족성당(사그라다 파밀리아)에서 내렸다. 입장권은 온라인으로만 구매할 수 있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가우디가 설계하고 건축을 진행하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뒤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가우디 서거 100주년이 되는 2026년 완공이 목표라고 한다. 하지만 이 성당은 이런 말로 요약할 수 없는 곳이며 이런 요약은 전혀 적절하지 않다. 예술적 각도에서 성당 곳곳에 상징과 표현 양식도 어마어마할 것으로 짐작한다. 건축학적 측면에서 당시 불가능했던 설계를 구현한 걸작임은 당연히 말할 나위도 없다. 이 분야에 식견이 부족한 나로서는 감히 상상만 할 뿐이다. 이 거대한 위대한 건축물에서 내가 금방 발걸음을 돌릴 수 없고 뭉클함을 느낀 힘은 이 성당이 커뮤니티를 끌어안는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성당은 종교적, 예술적 가치를 넘어 건축 당시 그 시대와 사회의 사연을 담아내고 있어 여행할 때마다 성당을 둘러보기 좋아한다. 규모 측면과 유명세 측면에서는 이 곳을 어느 다른 유럽의 성당과 비교하여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건축물은 찬양을 받을 대상을 위해 그 앞에 무릎 꿇는 대중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다른 성당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을 준다. 그 안에 들어서는 사람들이 경외감보다는, 신의 품의 안기고 창조물의 생명력을 간접적으로 누릴 수 있는 그런 공간이다. 건물 지하 층에는 가우디가 시신이 안장되어 있다.
적당한 노천카페에서 점심을 먹고 버스 투어를 마친 뒤 저녁에는 먼저 스페인 여행 중인 딸의 친구 가족을 만났다.
7/2
바르셀로나 북쪽에 위치한 지로나는 왕좌의 게임과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촬영지로 잘 알려진 중세시대 유적지가 잘 보존되어 있는 유서깊은 도시이다. 이날 관광은 한국인 관광 가이드를 미리 예약해 두었는데, 어쩌다 보니 우리말이 서툰 딸, 그리고 "안녕하세요"도 모르는 딸의 미국인 친구까지 데려가게 되었다.
코스타 브라바 지역의 아름다운 해변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토사데마르라는 해변 마을에 잠시 들었다. 일주일 정도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은 그런 아름다운 마을이다.
토사데마르에서 성벽을 따라서 걸으며 바다 조망을 즐긴 뒤 지로나로 향했다. 지로나 구도심에서는 가이드 설명을 들으면서 성당까지 올라갔다가 두 시간 정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바르셀로나로 돌아왔다. 바르셀로나에서 꼭 방문할 곳으로 지로나를 꼽고 싶다.
이날 저녁에는 바르셀로나 항구에 있는 해산물 식당에서 각종 해산물 요리를 맛보았다. 음식맛과 신선도, 서비스, 전망 모두 10점 만점에 10점을 주고 싶다. 바르셀로나 항구는 밤늦도록 젊은이들로 붐볐다. W호텔을 중심으로 늘어선 상가에 불이 들어오고 젊은이들이 붐비는 풍경은 마음을 무장해제 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사진 좀 찍어올걸... 사진이 하나도 없네.
7/3
아침 식사 후 택시를 타고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위치한 몬주익 언덕으로 향했다. 바르셀로나 공항에서 호텔로 갈 때 해안 도로를 타고 갔는데 해안 반대편으로 높은 언덕과 성벽 같은 것이 보여서 무엇인지 궁금했다. 호텔로 와서 찾아보니 몬주익이라는 지역이었다. 몬주익 언덕에 오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전철을 타고 몬주익 언덕으로 가는 푸니쿨라를 타는 방법도 있고, 시내버스를 타고 가고나 걸어올라가도 된다. 푸니쿨라에서 내리면 꼭대기에 위치한 캐슬까지 갈 수 있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중턱에서 내려서 캐슬이 위치한 꼭대기까지 걸어올라갔다. 몬주익은 유태인의 산이라는 뜻이라는데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치른 스테디움이 위치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사실은 이날 피카소 미술관에 가고 싶었다. 피카소 작품은 프랑스나 다른 미술관에서 많이 보았지만 피카소 단독 미술관에는 특별한 것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숙소도 피카소 미술관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잡은 것이다. 하지만 입장권이 매진이었다. 공교롭게도 매주 첫째주 일요일이 무료 입장이어서 사람들이 몰렸는지 입장권을 구할 수 없었다. 몬주익은 그 차선으로 향한 것이다. 몬주익 캐슬도 매주 첫째주 일요일이 무료 입장이라서 사람이 많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한가했다. 화려한 캐슬은 아니지만 몇 백 년에 걸쳐 다른 용도로 쓰이며 조금씩 증축되면서 사용된 공간과 마주하는 느낌은 또다른 감동을 주었다. 바르셀로나를 항구까지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으로 이곳이 최고인 것 같다.
캐슬에서 언덕을 따라 내려오면서 몬주익 묘지와 올림픽 스테디움을 스쳐지나듯 보고 몬주익 정원을 산책했다. 몬주익 정원은 수풀이 우거지고 오래된 돌길이 아기자기하게 나있어서 무척 아름답고 걷기 좋았다. 다리가 무거워질 때쯤 야외 에스컬레이터를 만나서 타고 올라가니 카탈루냐 국립미술관으로 이어졌다. 역시 첫째 주 일요일 무료 입장이었고 몹시 붐볐다. 이곳은 몬주익 분수쇼를 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나는 미술품에 관심이 많아서 미술관을 돌아보았는데 바르셀로나 출신 화가들의 작품을 놀랍도록 많이 볼 수 있었다. 피카소 미술관은 가지 못했지만 이곳에서 카탈루냐 출신 화가들의 작품을 실컷 본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카탈루냐는 바르셀로나를 위시한 스페인 북부지역인데 언어도 약간 다르고 카탈루냐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이 강한 듯 하다. 더 오래 있고 싶었지만 구엘공원에 4시 입장이 예약되어 있어서 발길을 돌렸다.
구엘공원은 가우디가 설계한 공원으로 워낙 유명한 곳이다. 구엘공원은 독특한 건축 양식을 촬영한 사진으로도, 자연과 건축물이 조화를 이룬 공간이라는 설명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곳이다. 그 다양한 디자인 요소와 자재의 사용, 건축물이 만들어 내는 자연과 쉼의 공간은 걸으면서만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이날 몬주익에서 구엘공원까지 택시로 이동한 것만 빼면 내내 걸어서 다녔더니 저녁 시간이 되자 몹시 지쳤다. 한식이 그리웠는데 대부분의 한식당은 8:30 넘어서 열거나 일요일에 열지 않았다. 일단 호텔로 들어와 한숨 돌리고 검색해 보니 숙소에서 도보 5분 거리인 고딕지구에 한국 음식을 파는 분식집 비슷한 가게가 하나 나왔다. 결론은 폭망이다. 나는 음식 남기는 것을 꺼리는 편인데 겨우 반 정도 먹고 식당을 나왔고 다음날 아침까지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바르셀로나 일정을 이렇게 마무리하여 약이 올랐지만 마지막 저녁으로 좋았던 여행 전체를 포장할 수는 없지. 내일은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타고 세비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