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짐도 풀지 않고 첫 날 여정을 기록했다. 기억이 증발할까 봐 마음이 조급했다. 서둘러 적고 일단 발행을 눌렀는데 다시 읽어 보니 빠뜨린 내용도 많고 내용도 부실하다. 당초부터 계획된 여행이 아니었으니 놀랍지 않다. 계획을 했다면 언제 어디에 갔는지 상기할 수 있는 자료가 충분했을 테고 장소에 얽힌 역사나 간단한 설명 정도는 적을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별 계획 없이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닌 여행이었다. 돌아다니다가 사람들이 모여있는 쪽으로 가본다거나 낮잠 자고 일어나서 개운한 기분이 지시하는 쪽으로 향했던 그런 여행. 그러니 내가 감탄을 연발했던 장소의 이름조차 모르겠다. 여행지에 대한 충분한 자료가 담긴 성실한 여행기는 쓸 수 없으니 여행기를 그만 쓸까 하다가 귀국 비행기에서 본 영화 <택시운전사>가 떠올랐다. 영화는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을 배경으로 하지만 이에 대한 정치적 또는 사회적 배경에 대한 대사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우연히 사건을 목격한 택시운전사의 관점을 벗어나지 않는다. 나는 스페인을 다녀왔지만 어쩌다 보니 그곳에 이른 무심한 여행자이며, 이런 무심한 여행자의 감상도 기록하고 읽어볼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 2월 쯤 딸 친구인 존슨 가족이 이번 여름에 스페인과 독일 등을 여행할 계획인데 스페인에 머무는 기간 동안 딸을 데려가고 싶다고 했다. 우리도 유럽 주요 도시를 여행한 적이 있지만 스페인은 못 가봤으니까 따라가도 좋다고 딸에게 허락했다. 여행을 함께하자는 제안도 딸을 통해 들었고, 승락도 딸을 통해 주었는데 5월이 되도록 존슨 가족에게서 아무 연락이 없었다. 언제 출발할 것인지, 스페인 어느 도시에 머물 것인지 아무런 연락 없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세상이 점점 시끄러워졌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졌고 국제적인 긴장이 더욱 심해졌으며 코로나 백신의 예방효과가 매우 짧은 것으로 드러났고 확산세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유가와 인플레이션이 치솟아서 항공료는 오르고 살림은 점점 빠듯해지는 듯 했다. 5월 말에 딸이 코로나에 걸린 뒤 회복은 되었지만 불안이 더욱 커졌다. 연락이 없는 것 보니 이런 시국에 굳이 여행을 떠나야 하는지 존슨 가족도 망설이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딸은 이번 가을에 11학년이 된다. 미국의 11학년은 한국의 고3처럼 입시에서 가장 중요한 학년이다. 실리콘밸리의 고등학생들은 여름방학에 아카데믹 캠프에 가거나 SAT 학원, 인턴, 사립학교의 AP 과정 선행, 실기 포트폴리오 준비에 몰두하고 있는데, 우리만 한가하게 여행이나 다닐 시기가 아니라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5월이 다 지나갈 때 쯤, 존슨 가족이 대략 일정을 잡았다며 연락을 해왔다. 존슨 부부는 아직 삼십 대 중반의 젊은 부부이다. 십대 중반과 이십대 초반에 결혼을 하여 딸의 친구가 첫째 아이이고, 아래로 두 아이가 더 있다. 두 사람이 만난 지 2개월 만에 결혼식을 올리고 바로 아이를 낳은 뒤 학업을 하여서 미스터 존슨은 변호사로 일하고 있고 미시즈 존슨은 학교 상담가(School Social Worker)로 일하고 있다. 미시즈 존슨이 예약한 항공편을 보니 유타주 솔트레이크에서 출발하는 에어 캐나다 비행기였다. 참고로 에어 캐나다는 내가 이용해 본 항공사 중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항공사이다. 이코노미석이 가장 좁고 자리를 선택하려면 웃돈을 내야 하고 고객센터 연락도 매우 어렵다. 또 솔트레이크는 미 중부에 있어서 산호세에서 비행기로 공중에서 운항하는 시간만 2시간 넘게 가야 한다. 존슨 가족의 막내가 여섯 살인데 이 아이와 개를 친정에 맡기고 가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계획인 것 같았다. 존슨 가족은 딸이 솔트레이크로 와서 자신의 친정에서 하루이틀 머물다가 같이 가면 좋겠다고 했다. 항공 예약을 생각하니까 머리가 복잡해졌다. 딸에게 엄마 아빠와 함께 바르셀로나로 가서 존슨 가족과 합류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해 보았다. 몰몬교에 대해 호기심이 많은 딸은 몰몬교 본산지인 유타주에 사는 몰몬교도들을 직접 만난다고 매우 들떠서 야단이었다. 딸 친구 가족은 몰몬교에서 탈퇴하고 지금은 무신론이지만 부부의 양쪽 집안은 독실한 몰몬교 신자이고 딸의 친구도 어릴 때는 몰몬교 전통에서 자랐다고 한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우리는 딸을 솔트레이크로 먼저 보내어 존슨 가족과 스페인 여행을 시작하게 하고 우리는 며칠 후에 출발하기로 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따로 여행하다가 존슨 가족이 다른 도시로 가는 시점에 딸이 우리와 합류하여 스페인 내 다른 도시로 가는 계획이었다.
그런 결정을 내릴 무렵, 올 여름 스페인의 더위가 기록적이라는 뉴스가 연이어 보도되었다. 마드리드는 연일 106도, 즉 40도가 넘는다고 했다. 몇 년 전 로마에서 더위 먹은 기억이 떠올랐다. 땡볕에 바티칸 성벽을 따라 걸을 때는 그대로 말라서 건조 오징어가 될 것처럼 숨이 막혔다. 정말 여행을 가야 하나 다시 망설이는 사이 항공권 가격이 성큼성큼 오르는 게 보였다. 일단 기후가 상대적으로 온화한 바르셀로나에서 해안을 따라 내려오며 여행하다가 마지막 날 이틀 정도만 마드리드로 가서 귀국하는 일정으로 항공권을 구입하고 호텔도 약간의 검색 후 예약을 했지만 모두 취소 가능한 옵션을 선택했다. 여행이 코앞에 닥쳐서야 돌아볼 곳을 알아보고 준비를 시작했지만 세 식구가 되어 나서는 첫 해외 여행은 못내 어색했다. 에어비앤비에 접속하니 6년 전 유럽 주요 도시를 네 식구가 여행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 결국 일이 바쁘다고, 귀찮다고 미루다가 여행 전에 예약한 일정은 바르셀로나에서 인근 도시인 지로나에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하루 뿐이었다. 처음으로 세식구가 되어 나서는 해외 여행 준비는 여러 모로 내키지 않았지만 지금 아니면 언제 또 딸을 데리고 여행을 가나 싶어서 꾸역꾸역, 할 수 있는 만큼만 준비하고 일단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