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그림의 용도
예전에는 여행 갈 때 DSLR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 아름다운 장면을 사진으로 저장하여 후에 꺼내보는 건 즐거운 일이다. 사진을 잘 찍는 건 아니지만 일반 디지털카메라나 휴대폰 카메라보다는 훨씬 만족스러운 사진을 얻을 수 있어서 카메라를 따로 챙기는 수고를 감수했다. 여행을 다녀오면 카메라에서 메모리 카드를 빼내어 천 장이 훌쩍 넘는 사진을 컴퓨터로 옮기면서 여행의 감격을 곱씹으면서 이어갈 수 있었다. 잘 나온 사진은 포토북이나 달력으로 만들어 한국에 계신 양가 부모님께 보내드렸다. 함께 다녀오긴 어려워도 여행지의 근사한 모습과 아이들의 해맑은 표정이 포착된 사진은 우리의 삶을 나누는 한 통로가 되었다. 이제는 휴대폰이 좋아져서 큰 카메라를 들고 다니지 않는다. 가벼운 휴대폰이 여행길의 감격을 기록하는 한결 손쉬운 도구가 된다.
하지만 카메라가 현장을 언제나 가감 없이 담아내는 건 아니다. 뷰파인더에 잘려서 담긴 장면은 늘 아쉬움을 주기 마련이다. 특히 그림을 즐겨 그리게 된 이후 사실을 기록하는 수단으로써 사진의 한계를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실물을 닮게 그리는 고전적인 화풍을 어려서 완벽히 마스터했던 피카소가 사진이 보편화 영향으로 추상화에 몰입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림이 사실을 기록하는 수단으로 사진에 견줄 수 없다고 단정할 수도 있다. 나도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했었다. 사진을 옮겨놓은 듯한 그림을 볼 때도 카메라가 더 잘하는 일을 굳이 사람이 하는 목적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면서 이런 생각이 돌아서게 되었다.
내가 참여하는 지역 수채화협회에 사실주의 수채화를 그리는 사진작가가 있다. 그의 그림은 사진인지 그림인지 모를 정도로 사실적이다. 사람들이 굳이 시간을 들여 그림을 그리느냐고 묻는다. 그의 답은 이렇다.
"사람들은 그림을 사진보다 오래 쳐다봅니다. 그림에서 의미를 찾아보려고 하는 거죠. 의미를 보게 하는 건 좋은 겁니다."
그림과 사진에 대해 이렇게 명쾌하게 정리된 생각은 없다. 단, 마음에 드는 풍경을 잘 찍어와서 그것과 똑같이 그린다고 해도 그때 풍경이나 느낌을 흉내 낼 수 없다는 건 알게 되었다. 어떤 그림은 있는 그대로를 옮겨놓은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 그림에 내 시선을 끄는 생명력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는 사람의 시각과 느낌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사실주의 그림, 특히 수채화로 사실주의 그림을 그리는 데에는 대단한 기술과 인내심이 필요하여 내가 감히 엄두를 낼 수 있는 분야는 아니다.
이번 여행을 떠나면서 그림으로 여행을 기록해보고 싶어서 여행용 미술도구를 들고 나섰다. 여행용 물감 팔레트에는 일반 수채화 물감과 달리 고체로 되어 흘러내리지 않는 물감이 작은 팔레트에 색상 별로 들어있다. 붓은 잉크 넣는 펜처럼 생겼는데 붓대에 물을 채워서 물감을 묻혀 그리면 따로 물통을 들고 다닐 필요 없이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모두 가볍고 작아서 매일 메고 다니는 크로스백에 쏙 들어가는 크기이다. 현장에서 한 스케치는 사진을 보고 그린 그림보다 훨씬 입체적이어서 여행하면서 한두 장면은 그려 보고 싶었다. 그런데 단 한 장도 그리지 못했다. 쑥스러워서 꺼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동네 수채화협회 회원들과 한 달에 한두 번 사생화(Plein Air Painting)를 그리러 갈 때는 모두 그림을 그리러 가는 것이어서 별다른 수줍음 없이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한 번은 미술도구를 꺼낼 줄 알았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집에 돌아온 뒤, 달리기 하는 동안 물을 마시지 못했다가 집에 와서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는 사람처럼 여행 그림을 그려댔다. 여행 그림은 내가 본 것을 그리는 사실적인 그림인데 어떻게 사진과 달리 내 느낌을 그림에 실을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러다가 펜화와 수채화를 섞어서 그리는 어반 스케치 스타일을 시도해 보았다. 어반 스케치는 철저히 현장에서 그려야 하니까 사진을 보고 그리는 것은 반칙이다. 어반 스케치라는 용어는 사용할 수 없고 화법만 빌려와서 그림을 그려보았다. 펜으로 형태를 정의하고 출발하기 때문에 보통 그리는 수채화보다 훨씬 빨리 그릴 수 있고 결과물에 대한 만족감도 크다. 우선 여정에 따라가며 바르셀로 거리와 지로나를 그리고 있는데 어디까지 그릴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