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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벗 Sep 18. 2021

그림에 홀린 증상

나의 하루 일과는 그림으로 시작해서 그림으로 끝난다. 누가 어찌 지내냐고 물으면 사실 맨날 그림만 그리니까 달리 답하기도 민망하다.


왜 매일 그림을 그리는지, 그것도 오십을 바라보고 시작한 그림에 내가 어쩌다 푹 빠졌는지 나도 궁금할 때가 많다. 뭐를 좋아하는데 이유가 필요 없기는 하지만. 그저 표현하고 싶은 게 많았나 보다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은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 자체는 그림으로 표현 못해서 이렇게 글까지 쓰고 있다.


어제는 한 달에 두 번 있는 야외 수채화 그림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이날만 기다리고 산다고 보면 된다. 집에서 그리는 것도 좋지만 아름다운 장면 속에 내가 들어가서 그 일부를 종이에 담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어제 모임 장소는 로스 알토스라는 마을의 역사를 모아둔 로스 알토스 히스토리 뮤지엄이었다. 마을의 역사라, 그건 내가 무지 좋아하는 아이템이다. 정치나 예술 그런 관념적인 역사가 아니라 오래전에 살던 사람들이 매일 살림하고 일하던 모습을 간직한 역사에 나는 늘 묘한 애틋함과 연결성을 느끼곤 한다. 딸아이 학기초 모임(Back-to-school Night)도 홀딱 까먹을 정도로 정신이 없지만 이 모임은 달력에 적어두지도 않았는데 절대 잊지 않았다. 고속도로 타는 게 무서워서 동네를 벗어나지 않지만 나는 280 고속도로를 타고 씩씩하게 로스 알토스를 찾아갔다. 그리고 마을 역사를 고이 보존하면서도 더 아름답게 가꾸어 놓은 그곳에서 두 시간 동안 마음껏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두 시간 그리지만 수채화 회원들이 모여서 모임 공지사항을 발표하고, 다음 일정 토론도 하고, 간단한 간식도 나누고, 현장에서 그린 그림 비평회도 하기 때문에 야외에 있는 시간은 꽤 길다. 뿌듯함과 피로감을 함께 안고 돌아와 거하게 낮잠을 자고 일어났다. 이메일이 와 있었다.

"아침에 납품하기로 된 일이 아직 안 왔는데, 보내신 거 맞죠?"

허겁지겁 컴퓨터를 켜고 폴더를 열어봤다. 시작만 해놓고 까맣게 잊어버린 파일이 눈에 들어왔다. 부리나케 일을 해서 보냈다.


중독인가를 판단할 때, 그것을 하느라 일상생활과 업무 기능에 상당한 지장을 주는 것을 기준으로 하기도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딸 학기초 모임도 까먹고 일감 받아놓고도 까먹는 나는 중독이 맞는 것 같다. 아, 또 있다. 도박 중독의 경우 다음에는 꼭 딸 것 같아서 계속 도박을 한다고 하는데, 나도 다음에는 더 잘 그릴 것 같아서 계속 그리는 것 같기도 하다. 이리보고 저리봐도 중독이 맞네. 당분간은 치료를 거부하고 그냥 중독에 빠지기로 하고 오늘 또 그림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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