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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작업 공간을 공개합니다

by 글벗

이사하면서 독립된 작업 공간이 생겼다.

절반 크기의 집으로 이사를 감행한 건 전적으로 이 공간에 눈이 멀어서였다. 집 외벽에 벽과 지붕을 이어서 대충 확장해 놓은 곳으로 집안에 들어가지 않은 가구들을 욱여넣고 남은 공간을 사용한다. 이 집에 이사오기 전에는 거실 한쪽에 책상을 놓고 번역일도 하고, 글도 쓰고, 그림도 그렸다. 남편이나 딸이 거실에 왔다 갔다 하면 은근히 신경이 쓰여서 화면을 끄기도 하고 그림을 후다닥 엎어놓은 적도 있다. 새 작업실도 내가 독차지하는 공간은 아니다. 남편이 재택근무하는 날은 공간을 공유해야 한다. 그래도 이 공간에 들어서면 출근하는 기분이 난다. 언제든지 그림 그리고 글 쓰는 곳이라고 지정한 공간이 생기니 마음가짐도 달라졌다. 화가가 되고 싶다는 꿈에 한 발짝 다가선 것 같기도 하고 매일 이곳에서 무언가 해야겠다는 설렘과 책임감도 느껴진다.


이 공간을 내 맘대로 나의 작업 공간으로 지정한 뒤 약간 손을 봤다.

월세집이니 큰 공사는 할 수 없고 그럴 만한 여유도 없다. 다행히 벽과 천장은 깨끗하게 흰색으로 페인트칠이 되어 있어서 그대로 두었다. 가장 거슬리는 건 수납장 문이었다. 때가 덕지덕지 앉아서 찐득거렸고 문 손잡이가 모두 짝짝이여서 어수선해 보였다. 먼저 때가 심하게 앉은 손잡이 주변을 수세미로 박박 닦아내고 목재 복원용 락커를 칠해서 리피니시를 해준 뒤 손잡이를 통일해 주었더니 훨씬 정돈되어 보였다. 글로 쓰고 보니 서너 줄이지만 팔 빠지도록 닦았다.

천장에 달려있던 오래된 긴 형광등은 모던한 트랙라이트로 바꾸었다. 트랙라이트 두 세트가 전구까지 합쳐서 80 달러 미만, 목재 복원용 락커가 10 달러, 문 손잡이는 예전에 부엌 캐비닛에 쓰고 남은 걸 썼으니까 들어간 돈은 100달러가 채 안 된다. 책꽂이 등 수납 가구는 집안에 맞지 않는 가구들을 이리저리 끌어다 맞추어 넣었다. 공간에 맞추기 위해 줄자로 밀리미터 단위까지 재었는데 다행히 잘 들어맞았다.

천장을 가로지르는 때가 꼬질꼬질한 전선은 때만 좀 벗겨낸 뒤 벽을 따라 대충 정리해 주었고 엉성한 마감재가 거슬리지만 어쩔건가. 대작이나 액션페인팅 같은 작업을 할 만큼 넓은 공간은 아니지만 수채화를 하기에는 충분한 공간이다.

미술과 글쓰기에 관한 책들도 한 군데 모으고, 여기저기 쌓아놓았던 미술재료와 그림도 이곳에 모아놓았다.

화가 지망생인 나에게 이 작업실이 한낱 럭셔리가 되면 어쩌나 좀 두려운 마음도 든다. 여기에서 나를 닮은 그림과 글이 느리더라도 하나씩 피어날 수 있도록 게을러지지 말아야지, 마음을 다잡아 본다.

스케치북에 그린 우리집 부엌. 9x12인치, 수채 물감과 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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