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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마당일기

사실은 분홍 꽃이었어

6월 1일 마당 일기

by 글벗

이 집에는 뒷마당 담벼락에서 갓 잠을 깬 제라늄 말고도 앞마당에 제라늄 몇 그루가 더 자라는데 이사 올 때부터 모두 주홍색 꽃을 달고 있었다. 샌디에이고는 겨울에도 날씨가 온화하여 1년 내내 꽃을 피우는 식물이 많다. 제라늄도 그중 하나이다. 게다가 앞마당은 울타리 없이 탁 트인 남향이어서 충분한 일조량의 공도 크다. 그렇다고 앞마당 제라늄이 사랑과 관심 속에 귀하게 자란 화초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멋대가리 없이 버티고 있는 늙은 가지에 오래전 시든 잎이 말라붙어 있고 뻘쭘하게 올라온 꽃대에 한두 송이 달려있는 주홍색 꽃은 민망하게 보였다. 어울리지도 않는 꽃을 빌려서 달고 있는 억센 잡초처럼 같았다. 어쨌든 앞마당 쪽 제라늄이 모두 주홍색이니까 뒷마당 제라늄도 꽃은 없지만 주홍색이려니 했었다.

08a03e4de854e7bfe271f387b194693fdfa995bd613e0bf5993edb335ed5e4f3.jpg 오늘 6월 1일 아침에 찍은 사진. 아침에는 이쪽으로 해가 안 들지만 햇살 아래에서는 활짝 웃는 것 같다.


이 뒷마당 제라늄을 처음 봤을 때는 화초가 이렇게 흉물스러울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열매도 맺지 않고 향내도 주지 않는 관상용 화초는 보기 좋자고 키우는 건데, 웃자란 가지에 곰팡이가 까뭇까뭇하게 낀 잎을 드문드문 달고 있는 제라늄을 키울 이유는 없었다. 시든 그루를 파내고, 땅을 갈아엎고, 잘 가꾼 제라늄을 사다 심어도 한국 돈으로 만원이면 되니까. 그래도 "아줌마, 나는 이곳에서 오랫동안 방치되어 괴로움을 당했어요" 이렇게 호소하는 것 같아서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올봄에 살아나지 않으면 내년 봄에 새로 심지 뭐. 한 철만 기회를 주기로 하고 큰 기대 없이 가지를 바닥까지 제거했다. 아무 변화가 없었고 강아지들이 계속 그루터기에 오줌을 싸서 걱정되었지만 물은 가끔 주었다. 한 달 동안 숨을 죽이고 있던 갈색 가지에 4월이 되자 초록색이 감돌더니 동글동글한 잎이 나왔다. 잎에는 금방 곰팡이들이 다시 달려들었고 자라는 것도 매우 더뎠다. 강아지들은 어린 잎사귀에 계속 오줌을 쌌다. 2주 전, 겨우 손가락만큼 자랐는데 꽃봉오리가 맺혔다.


몇 주 동안 입을 꼭 다물고 있던 꽃받침 사이로 하얀 꽃잎이 빼꼼 보였을 때 무척 설레었다. 그런데 봉오리가 조금씩 벌어지면서 붉은색이 보였다. "어, 꽃봉오리가 여물면서 꽃잎 색깔이 바뀌기도 하나?" 그건 아니고, 꽃잎 가장자리만 보여서 깜빡 속은 거였다. 청초한 하얀 꽃을 내심 기대하고 있던 터라 아주 조금 실망스럽기도 하지만, 옅은 분홍에서 짙은 분홍까지 색내림으로 화려한 제라늄도 특별한 느낌이다. 어쨌든 주홍색은 아니니까. 구질구질한 포장지에 싸여 내게 온 선물 같다.

geranium.jpg 왼쪽. 1주일 전 개화 초기. 오른쪽. 오늘 아침 만개한 모습. 햇빛을 받아 노란 색조로 보인다. 햇빛은 아침이나 저녁 모두 세상을 따뜻한 빛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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