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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마당일기

닮고 싶은 꽃 수국

푸릇푸릇하고 꼿꼿하게 늙기

by 글벗

지금은 7월 중순. 요즘 우리 마당의 주인공은 수국이다. 수국의 모습은 여름을 닮았다. 깻잎처럼 생긴 잎사귀에서는 푸르게 우거진 여름 숲의 대담함이 엿보이고, 탐스러운 꽃 모양은 굵은 소낙비처럼 시원스럽다. 수국은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유래한 화초라고 한다. 비가 많은 한국의 여름에는 물을 좋아하는 수국이 비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자랄 것 같다.


여름이 건조하고 뜨거운 캘리포니아에서도 수국은 인기 있는 꽃이다. 다양한 종으로 개발되어 모양도 다양하지만 대담한 잎과 탐스러운 꽃을 보면 수국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여기에서는 그늘을 만들어 주고 물을 자주 주어야 키울 수 있다. 수국을 보는 즐거움에 비하면 견딜 만한 수고이다. 대개 화초에 물을 줄 때는 화초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흙을 고루 적시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화초에 따라서는 잎에 물이 묻는 것을 싫어하는 화초들이 많다. 물이 묻으면 잎이 상하기도 하고, 잎에 묻은 물방울이 확대경처럼 빛을 모아서 잎을 태우는 일도 있다. 수국은 비가 많은 곳에서 와서 이런 규칙에 가끔 예외로 해준다. 호스를 샤워기처럼 화분 위로 올려서 가짜 비라도 흠뻑 뿌려준다. 비가 많은 고향 한 번 기억하라고.



수국을 기를 때는 햇빛 조절에 신경을 써주면 좋다. 봄에 날이 따뜻해지면 마른 가지에서 뾰족한 푸른 잎이 먼저 나오는데 이때는 해를 보여주면 잘 자란다. 잎이 늘어나면서 물을 점점 많이 줘야 하지만 계속 햇빛 아래 두어도 괜찮다. 기운이 넘치는 젊은이처럼 잘 자라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시기이다.


꽃이 피기 시작하면 햇빛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대개 꽃이 피는 화초는 햇빛을 봐야 꽃봉오리를 맺는데 수국은 예외이다. 요즘처럼 잎이 무성하고 꽃이 한창 필 때는 수국은 밥상을 폭풍 흡입하고도 금세 배고프다고 아우성치는 애들처럼 어제 물을 주었는데 오늘 낮에 또 목마르다고 한다. 목이 마르면 꽃잎과 잎사귀가 축 늘어뜨리고 시위를 하니까 안 들어줄 수가 없다. 물을 주는 것을 며칠 미뤘다가는 그 여름 수국 꽃은 거기서 끝이다.


여름에 병충해에 노출되기도 한다. 우리 집 수국은 해마다 꽃이 한창 필 때 곰팡이류의 병이 잎사귀에 생긴다. 곰팡이 약을 부지런히 뿌려주면 어느 정도 낫는다. 올해는 꽃이 처음 필 때 한 번 뿌려주고 말았더니 갈색으로 얼룩진 잎이 많다. 곰팡이 약은 주로 구리가 들은 것을 많이 사용하고 살충제와 달리 잎 전체를 코팅해주듯 충분히 뿌려주어야 효과가 있다. 잎 전체가 곰팡이에게 당하고 나면 회복이 어려우니까 그때까지 방치하면 안 된다.


그리고 참 곱게 늙어간다. 5월이 시작되면서 싱그럽게 피워낸 선명한 분홍 꽃은 늙으면서 점점 초록을 띤다. 같은 화초에서도 흙의 산도에 따라서 파란 꽃을 피우기도 한다. 분홍이든 파랑이든 선명한 색으로 듬성듬성하고 어설프게 피기 시작한 어린 꽃은 시간이 지나면서 탐스럽고 둥근 수국으로 성숙한다. 물만 부지런히 준다면 꽃이 절정을 지난 후에도 모양은 변하지 않는다. 여전히 단정한 모습으로 꽃대 위에 꼿꼿하게 자세를 지킨다. 다만 젊은 꽃의 선명한 색은 희끗희끗한 연두로 변하기 시작한다. 대담함이 매력이었던 모습에 섬세함이 엿보인다. 그렇게 연두로 변한 꽃은 새로 피는 분홍 꽃과 보기 좋은 조화를 이루면서 잎을 떨굴 때가 될 때까지 오랫동안 피어있다.



분홍 꽃일 때는 드라이플라워를 하면 모양이 예쁘지 않은데, 연두로 변한 뒤에 드라이플라워를 만들면 잎의 수분이 금방 증발하면서 꽃잎이 그대로 있어서 2~3년 정도는 모양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다.


나는 우리 마당에 핀 수국의 나이 정도 되었을까?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나이. 수국처럼 기운차게 잎을 내던 시절이 있었을까? 탐스럽게 핀 시절이 있었을까? 그만큼 기운차고 탐스럽지 않았어도 늙을 때는 수국처럼 곱게 늙었으면 좋겠다. 분홍색 젊은 꽃 옆에 있어도 흉하지 않게. 오히려 젊은 시절 선명한 색이 푸르게 바래서 섬세한 아름다움이 깃든 수국처럼. 이제 나이 좀 먹었으니까, 상처가 많으니까, 고생 많이 했으니까 그래도 되는 것처럼 쉽게 꽃 모양을 포기하지는 말아야지. 늙어도 내 모양으로 마음을 추스르면서 꼿꼿하게, 그렇게 늙고 싶다. 수국처럼. 젊어서 수국처럼 살지 못한 자에게 욕심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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