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가드너의 가을맞이
한창 피던 꽃이 그만 피기 시작한 지 꽤 오래되었다. 누렇게 뜬 잎이 늘어나고 늦게 싹튼 화초는 자라지도 못하고 고개를 떨군다. 올봄에 일당을 주고 가지치기를 맡겼더니 귀찮은 잔가지는 그냥 두고 가서 바싹 마른 잔가지가 누렇게 마른 잎을 너저분하게 달고 있는 모습도 흉하다. 주말에 손질해 주어야지, 하고 나서 벌써 주말이 수십 번 지나갔다. 여름 내내 잎을 내고 꽃을 피운 화초들을 돌보려고 오늘은 아침부터 팔을 걷어부쳤다.
먼저 수국. 수국은 절정을 진즉에 넘어서 잎이 누렇게 떴다. 꽃은 저절로 드라이플라워가 되었지만 곰팡이에 병들어서 보기 안타깝다. 그렇게 마르고 병든 잎사귀와 꽃 밑에 숨어서 새순이 나오고 있다. 새로 나는 잎에도 곰팡이 감염증이 보인다. 일단 늙은 잎사귀와 꽃을 모두 잘라주고 물을 듬뿍 주었다. 물이 좀 증발한 뒤 곰팡이 약도 듬뿍 뿌려주었다. 경험상 감염된 잎이 많을 때는 곰팡이 약이 잘 안 듣는다. 곰팡이에 감염된 잎을 제거한 뒤에 뿌리는 것이 훨씬 효과가 좋다. 구리는 화초를 키울 때 여러모로 쓸모 있는 물질이다. 이 곰팡이 약도 구리 성분이고 달팽이가 채소를 다 먹어버릴 때도 구리로 만든 동전을 주위에 놔두면 피해가 훨씬 덜하다. 온도가 낮아져 화초의 대사작용이 둔화되어 쉬면서 질병도 잘 이겨내기를 바랄 뿐이다.
올여름에 한 뼘도 안 되는 풀에서 꽃대를 올리던 제라늄은 힘차게 가지를 키웠다. 꽃은 더 이상 피지 않지만 잎은 계속 번성하고 있다. 가을과 겨울 푹 쉬고 내년 봄에 꽃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잎이 좀 적어야 겨울을 나기 쉬울 텐데... 어떡하려고 지금 잎을 저리 무성히 내는지 답답하네.
한두 달 전쯤 푹 물러 곰팡이가 살짝 난 토마토를 화단에 버렸더니 야리야리한 싹이 고개를 내밀었다. 며칠 지켜보다가 튼실해 보이는 세 포기를 골라서 작은 화분에 심었더니 몇 주 잘 자랐었다. 참 기특하네, 했었는데 지난주에 물을 게을리 주어 모두 말라버렸다. 혹시나 살까 하는 마음에 물을 주었지만 오후에 다시 봐도 살기는 글렀다. 토마토에게 큰 죄를 지은 기분이다. 잘 기르지도 못할 거면서 왜 싹은 트게 했는지. 참 미안하다. 그래도 감자에서는 메추리알만 한 감자가 열렸다. 썩은 감자 한 알에서 앞으로 몇 개의 감자를 더 거둘지 조금 설렌다.
오늘 가장 오래 공들인 화초는 수선화 같은 꽃을 피우는 풀들이다. 이런, 이름도 아직 모르는군. 여름에 반짝 꽃을 피우고 이제는 꽃 대신 마른 잎만 잔뜩 달고 있는데, 세를 놓은 방 창문 쪽에 있어서 돌봐주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옆집 사이에 사생활 보호를 위해 심어놓은 침엽수 아래에 줄지어 심어놓아서 침엽수에서 떨어진 마른 잎이 쌓이고 중간중간 억새풀처럼 자라는 제라늄과 잡초까지 있어서 마른 잎을 제거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마른 잎을 모두 떼어주고 마른 꽃대를 자르고, 잡초를 제거하고, 이것저것 하는 데 세 시간이 꼬박 걸렸다. 손톱 밑이 까맣게 되는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풀에 엉겨붙은 가지를 잘라내다가 눈에 뭐가 톡 튀어 들어갔다. 암만 눈을 씻고 눈물을 흘리고 눈을 까뒤집어도 잡티가 눈 속에서 돌아다니기만 할 뿐 나오지 않았다. 한 시간은 족히 고생하다가 문득 의료보험 없는 우리 상황이 떠올랐다. 이 정도 잡초 정리하는데 많이 줘야 $150일 텐데, 만일 잡티가 나오지 않아 병원에라도 가게 된다면 얼마가 나올까? 뾰족한 게 들어갔는지 눈은 계속 아프고, 걱정만 더해 갔다. 기분이 절벽으로 떨어지려고 할 때, 다행히 잡티가 나왔다. 눈에 잡티가 들어있는 상태와 빠져나간 상태는 밤과 낮의 차이만큼 컸다. 다음에 마음먹고 마당을 돌볼 때는 꼭 보안경을 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