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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마당일기

꽃도 안식년

by 글벗

매년 고운 꽃을 피우는 플루메리아가 올해는 조용하다. 이 꽃이 피는 걸 보고 여름이 온 걸 실감하곤 했는데 서운하다.


플루메리아라는 이름은 조금 생소할지 몰라도 꽃 생김새는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조차 익숙할 것 같다. 어렸을 때 꽃을 그리라고 하면 크레용으로 쓱쓱 그리던 모양이기도 하고, 꽃 모양 머리핀이나 귀걸이 같은 장식품으로도 애용되는 모양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모아나에서도 어린 모아나가 빨간 플루메리아를 귀에 꽂고 다닌다. 하와이에 가면 플루메리아가 길거리에도 즐비하게 서있다. 향기도 좋아서 플루메리아가 흐드러지게 핀 거리를 걸으면 초현실적 세계에 와있는 기분이 든다.

3년 전 쯤 찍은 사진이다



우리 집 플루메리아는 딸이 3학년 때 학교에서 화초 판매를 도와주고 받아온 것이다. 딸이 다니던 초등학교에는 가든 클럽이 있었다. 학교 안에 100평 정도 되어 보이는 원예 공간이 있고 거기에 다양한 화초와 채소를 길렀다. 고학년 아이들로 구성된 클럽 회원들이 점심시간에 식사를 일찍 마치고 화원에 들러 물도 주고 잡초도 뽑으면서 화초를 돌봐준다. 화단을 책임지는 선생님은 워터스 여사였는데, 1년 동안 정성껏 돌본 화초가 예쁘게 꽃을 피우는 봄에 화초를 작은 화분 여러 개에 나누어 담아서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판매했다. 물론 수익금은 학교를 위해 쓰인다. 수익금이 학교를 위해 쓰인다니까 나도 화초를 사 오라고 몇 푼 들려 보내기도 했다.


딸은 가든 클럽에서 일을 돕는 것을 좋아했다. 매년 화초 판매가 끝나고 남은 화초는 판매를 도운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주로 다육식물을 가져왔는데 그 해는 웬 나뭇가지를 하나 가져왔다. 질감이 비늘 덮인 듯 조금 징그러워 보이는 나뭇가지를 별 기대 없이 화분에 심었다. 그 해는 아무 변화가 없어서 죽은 줄 알았다. 다음 해 봄이 되자 신기하게 뾰족뾰족 잎이 몇 개 나왔지만 꽃이 피지는 않았다.

그동안 신경 써서 아침저녁 문안을 받았으면 꽃을 피우는 예의쯤은 보여야 할 것 아냐. 좀 무심한 꽃이군.

토라진 내 마음이 전달되었나? 다음 해에는 정말 고운 꽃이 여름 내내 피었다. 봄부터 올라온 잎사귀가 배경을 만들어주면 야무지게 돌돌 말린 꽃 봉오리가 도도하게 올라온다. 그렇게 며칠 입을 꼭 다물고 있던 봉오리는 어느 날 아침 자고 일어나면 그려 넣은 것처럼 완벽한 모양의 꽃으로 변신해 있다. 그 꽃이 지기가 무섭게 꽃대가 조금 더 자란 마디에서 꽃봉오리가 또 맺힌다. 샌디에이고에서는 그렇게 6월부터 9월까지 줄기차게 피었다.


그런데 올해는 뾰족한 잎사귀만 계속 낼뿐 아예 꽃대가 올라올 생각조차 없는 것 같다. 플루메리아 잎사귀는 고운 꽃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은 근위대처럼 군기가 바짝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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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과 오른쪽은 각각 8월과 5월에 촬영한 플루메리아인데, 잎만 조금 많아졌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플루메리아가 물을 좋아하지 않지만 물이 부족해도 꽃이 안 필 수 있고, 최소한 하루 6시간 이상 햇빛을 봐야 하는데 일조량이 부족해도 꽃이 안 핀다고 한다. 지난달부터 물도 부지런히 주고 볕이 잘 드는 곳으로 화분도 옮겨 주었는데 계속 침묵이다. 올해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 같다. 꽃을 안 보여주어 무척 서운하지만 매년 꽃을 피우느라 힘들어서 쉬고 싶어 보이니까 미워하지 말아야지. 하지만 너무 오래 쉬어서 자신이 얼마나 고운 꽃을 피울 수 있는지 잊어버리면 안 되니까, 잎이 지고 나면 플루메리아가 좋아하는 자리를 찾아서 옮겨주어야겠다. 그러면 내년에는 고운 꽃을 다시 볼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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