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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미 Jan 08. 2020

비의 종착지.


  어제부터 하늘에 잔뜩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더니, 이내 집을 나선 길에는 비냄새가 났다. 살면서 아마 한 번쯤은 맡아봤을 그 냄새. 아스팔트 위를 촉촉이 적신 빗줄기가 요란하게도 제 등장을 알리려는 것 마냥 여기저기 자신의 향을 뿌리고 다녔나 보다. 뺨을 지나치는 바람은 어제보다 조금은 차가워진 온도다. 아마 내리는 빗줄기에 그만 몸이 젖어 자신의 온도를 빼앗겼겠지. 갑자기 든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며 나는 입고 온 코트의 깃을 세우고 좀 더 목을 단단히 감쌌다. 아마 오늘보다 내일은 조금 더 쌀쌀하겠다. 늦가을부터 슬슬 발동이 걸리는 수족냉증은 그제처럼 완연한 겨울일 때 빛을 발하고, 어제부터 기온이 뚝 떨어진 겨울날이면 더욱 빛을 발한다. 이쯤 되면 거의 반포기 상태로 겨울을 나는 방법밖에 없는 현실은 나에게 너무도 가혹하지만 어쩌겠는가. 저 하늘의 대기 현상까지 관여하기엔 나에겐 그만한 힘이 없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이놈의 빗줄기는 차라리 하늘에서 땅까지 곧은 방향으로 흘렀으면 좋겠다만 이것 또한 어디 내 마음대로 되겠는가. 아무리 우산을 써도 이윽고 우산 끝에 맺힌 물방울은 신발의 발등 혹은 코트 끄트머리, 여기에 바람까지 가세하면 나의 살갗까지. 모두 다 나를 젖게 만든다. 만약 주변 건물이 하나라도 있으면 끝내 이에 부딪히고 그 옆에 있는 이를 지짐 지짐 젖게 만들겠으나 나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젖은 나를 발견할 것이다. 마치 하얀 도화지에 수채화 물감이 물들어 이윽고 전체를 덮듯 슬그머니 곁으로 와 나의 전체를 물들였던 너처럼. 말하고 나니 너는 비와 참 닮았구나. "잠시 머무르리라 생각했던 너에게 어느새 익숙해진 내 모습을 보며 가끔은 놀랐다. 조금 스며들었다고 생각한 것이 알고 보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었다는 사실을."


  너에게만 나는 향이 있었다. 네가 평소에 쓰는 향수와 네 체취가 한데 섞여 세상에 단 하나뿐인 향을 그렇게 너는 뿜어내고 있었고 우연히 너에게 안겼던 날, 나는 후회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맡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아니 차라리 너의 품에서 시간이 멈췄으면 했다. 딱 한번 맡은 그 향을 오늘날까지 기억하는 나는 여전히 후회한다. 지금은 맡을 수가 없거든. 그래서 그런지 길을 걷다 네 체취는 아니나 네가 쓰던 향수의 향을 맡으면 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돌아간 시선 끝에 네가 있진 않을까 내심 기대를 하고 말이다. 우연히 안겼던 날처럼 우연히 마주칠 수도 있는 것이 사람 인연이라는 거니까. 그러나 그 끝엔 늘 네가 없었다. 있을 수가 없지. 너와 나의 공통점은 우리였는데 우린 다시 너와 네가 되었으니 말이다. 있을 수가 없지. 애석했으나 이 또한 살아가면서 맥주 한 캔에 추억할 그리움이 하나 늘었으니 그 나름대로 괜찮다 여겼다. 너는 늦은 밤 언제나 꺼내볼 수 있는 나만의 추억일 테니.


저 웅덩이에 비치는 빗줄기는 자신의 종착지를 알고 있다.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다가도 그들이 스며드는 곳은 결국 저 땅 밑임을 알고 있다. 나는 어떠한가. 이 사람 저 사람, 이 시간 저 시간을 함께 보내며 이곳저곳을 다니는 내 여정의 종착지는 어디란 말인가. 그에게 흠뻑 취해버린 나의 종착지는 어디였단 말인가. 잘 걷던 길 옆구리에 예기치 못한 무언가가 튀어나와도 설령 그게 나의 방향을 잃게 만들지라도.

살아있기에 다시 살아갈 뿐이다. 마음 한 켠에는 언제나 바라볼 수밖에 없는 무언의 그리움을 품고서 그저 무던하게 살아갈 뿐이다.

  나는 나의 종착지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다. 살아가는 내내 알 수 없을 것이고, 어쩌면 죽는 날까지도 끝내 알지 못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저 하늘의 빗줄기처럼 무던하게 제 길을 걸을 순 있지 않겠는가. 나의 살아갈 모든 날, 모든 순간을 위해 그리 할 수 있지는 않겠는가. 하늘을 가득 채운 미세먼지로 맑은 숨을 쉴 수 없었던 날에 내리는 비는 마치 한 줄기의 빛과 같았다. 그칠 줄을 모르고 내리 비 덕분에 진짜 빛은 볼 수 없었지만 이내 내 마음을 꽉 채운 일련의 먹먹함 또한 내리는 비에 흘려보내리라 다짐한다. 이 먹먹함을 다 씻어내기란 지금의 비만으로는 부족한데, 오늘만 오려나. 일기 예보를 보니, 내일도 하루 종일 강수 확률이 80%다. 됐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뱉고 나니 긴장이 풀렸나 그제서야 더 차가워질 수도 없는 손과 발의 온도가 느껴졌다. 어느 곳이든 좋으니 이젠 안으로 들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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