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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미 Jan 21. 2020

늘릴 것인가, 줄일 것인가

관계, 그 애매한 기한


모든 것엔 정해진 기간이 있다. 음식을 만들기 위해 재료를 살 때도 유통기한이 있고 이벤트에 당첨되어도 사용 가능한 기간이 있다. 재료의 유통기한은 이를 넘어 사용하면 분명 탈이 날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고 이벤트의 사용 기간 또한 무분별한 남용을 위한 것이리라. 모든 것 중 이를 얼마든지 줄이거나 늘릴 수 있는 것이 있다. 바로 관계의 기간이다.


“너와 내가 오늘부터 사랑을 시작할 거야. 그런데 그 기간은 오늘부터 한 달만이야.” 혹은 “나와 너는 오늘부터 친구야. 그런데 그 기간은 오늘부터 일주일만이야.”라고 말하고 시작하는 이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아, 간혹 존재하는 예외를 위해 문장을 잠시 정정하겠다.

“너와 내가 오늘부터 사랑을 시작할 거고 이 기간은 오늘부터 한 달까지야.” 혹은 “나와 너는 오늘부터 친구긴 한데 이 기간은 오늘부터 일주일까지야.”라고 말하고 시작하는 이는, 대체로 이 세상에 없다.

우연히 관계를 맺고 모두가 불가항력 혹은 자신의 의지대로 이를 끊는다. 끊기 직전까지 이들은 수많은 연장과 취소를 번복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관계의 보편적인 기한은 대체 어느 정도일까, 한 달? 적어도 사계절은 함께 보내봐야 하니 일 년? 아니, 어느 드라마에서 그랬다. 도파민과 세로토닌 이 호르몬의 농도가 가장 짙을 때는 이 년이라고. 그럼 이 년인가?


어쨌든 여차여차 사랑을 했고 친구를 했고 서로 볼꼴 못 볼 꼴 다 보았다 하자. 그리고 끊어진 관계는 그럼 정말 끝난 것일까? 아니다. 끊어진 관계에 다시 시작되는 건 이름 모를 그리움의 기간이다. 끝난 줄만 알았던 나와 너의 관계는 다시금 시작되었고 이 이름 모를 그리움은 숱한 밤 동안 나와 너를 괴롭힌다. 그때 그 시절의 너와 나의 모습이, 혹은 나의 모습이 그리워지는 시간이 시작되고 만 것이다. 여기서 물론 괴롭힘은 너 혼자 혹은 나 혼자만 해당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둘 중 누구 한 명은 꼭 괴롭혀야 직성이 풀린다면 솔직히 너만 괴롭혔으면 좋겠다. 이 고약한 그리움에 내내 괴롭힘 당해본 사람은 내가 아니고 상대가 그러길 바라는 마음이 조금씩은 있지 않은가. 알고 보니 내가 가장 고약한가?


아마 그리움이라는 것은 단순히 너와 나의 겉모습만이 아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 그 시간에 너와 내가 있었고 이를 공유했고 서로가 서로에게 무심하다가도 애틋했던 일련의 그 모든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시간을 함께 나눴던 이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너니까. 그 시간에 만약 돌아간다면? 이라는 수많은 가정법이 시작되는 순간, 괴롭힘은 시작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은 희미했던 추억을 더욱 짙게 만들고 그 안에 너와 나는 더욱 선명해지고 만다. 내가 말한 고약함은 바로 이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오지도 않는 잠 괜히 더 못 자게 텅 빈 속을 물음표만 가득하게 만드니까.


모든 것엔 정해진 기간이 있다. 그리고 재료를 사거나 이벤트에 당첨된 것이 아니라면 그 기간을 줄이고 늘릴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늘릴 것인가, 줄일 것인가. 아니면 끊겠는가? 모든 선택은 당신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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