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미 Feb 29. 2020

당신이 헛헛한 이유

    새삼 느꼈다. 어떤 이별이든 늘 마음 언저리를 헛헛하게 한다는 것을.

정이 많은 편이다. 정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남들보다 나는 조금 더 정이 많은 편이다. 초, 중, 고등학교 12년과 대학교 4년, 그리고 갖은 아르바이트의 경력까지 합하면 인생의 반절 넘게는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살았다. 그래도 어릴 땐 만남이 헤어짐보다 쉬웠다. 누구든 언제가 됐든 나를 소개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고 처음 본 상대와 새로운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간다는 사실이 좋았다. 가진 것이 없어 뭐든 채워나가고자 하는 욕심이 컸던 까닭이었을까, 아무렴 좋았다. 애써 얻은 관계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관계에 있어 늘 아쉬운 쪽이었고,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관계에 있어 두려운 마음이 들면 늘 도망치는 쪽이었다. 어리석게도 그땐 망치는 것보다 도망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 여겼으니.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만남도 헤어짐도 그 어느 것도 쉬운 일이 없었다. 그래서 점점 거리를 두는 버릇이 생겼다.


학원에 다녔다. 과정은 10개월이었으나 미래를 생각한다면 그 정도 투자는 괜찮다고 여겨 다니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 별 감흥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다녔다. 정말 그냥 다녔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밥때가 되면 밥을 먹었고 수업을 듣다 졸리면 그대로 졸았다. 뭐, 가끔 지각도 하고. 다만 성인이 된 이후 이렇게 긴 시간 동안 학원에 다닌 적은 처음이기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모두가 성인에다 다양한 연령층이 공존했고 당시 나에겐 사람에 대한 벽이 아주 튼튼했을 때였다. 게다가 만남이 있으면 어찌 됐든 헤어짐이 있다는 생각은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아도 되는 충분한 이유였다.

훗날 알게 되었다. 오히려 견고할수록 그 속에 틈이 많을 수도 있다는 것을.

한 달, 두 달, 석 달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 수업은 끝났고 어느덧 최종 시험을 위한 모의고사만 남겨두고 있다. 이것만 다 보면 정말 끝이구나. 싶은 생각이 듦과 동시에 괜히 마음이 울적해졌다. 나름대로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짐의 경력이 꽤 쌓였다고 생각했고 마음을 나누지 않을수록 이 과정은 쉬웠기에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여겼다. 내가 생각했을 때 나는 마음, 그러니까 정을 주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아니었다. 마음을 주지 않겠다는 그 견고한 다짐 속 끝없이 새어나간 것은 되레 그 마음이었다.

곧 종업식이다. 종업식이 끝나고 나면 학원에 다니기 전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다. 누군가는 직장인으로서 또 누군가는 엄마로서 저마다의 생활 반경으로. 가장 위안이 되는 점은 이 세상에 영원한 이별은 없다는 말이다. 인연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라 한번 닿았다면 내내 이어져 있다는 말. 때문에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라 생각지 않는다. 분명 그립고 생각나는 만큼 서로를 찾을 것이고 때때로 시간도 내어 푸지게 놀기도 할 것이다. 다만 하루의 반나절을 매일매일 함께 하며 수업을 듣고 밥을 먹으며, 점심시간 그 짧은 시간을 이용해 우당탕 여기저기 구경하는 것을 이젠 할 수 없다는 것. 졸음에 필기를 놓친 부분을 쉬는 시간에 베끼는 일도, 가끔 수업을 마치고 소주 한 잔 기울이는 것도. 이젠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을 이야기하기도 바쁠 테니 일상을 시시콜콜 나누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짧았다 할 것이고 누군가는 너무도 지루했다고 할 그 시절의 우리가 함께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하루다.

마음이 헛헛한 이유, 더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어서임을 안다. 헛헛함이 클수록 그만큼 그들을 애정 했다는 증거일 테니. 그러니 이 눈물은 단순한 기쁨과 슬픔이 아닌 감사함의 의미라는 것. 어떠한 이별도 쉽진 않겠지만 당신을 만날 수 있었음에, 그래서 이 모든 이별을 감당할 수 있음에, 그럼에도 감사하다는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늘릴 것인가, 줄일 것인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