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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미 Mar 19. 2020

가장 염치없는 기도


우리네 삶은 탄생과 동시에 상실의 카운트가 시작된다. 어린 시절의 친구, 감사했던 선생님, 가족, 나의 동물 친구 그리고 당신과도. 언제나 그래왔듯 만남의 기쁨과 상실의 아픔을 반복하며 나이를 먹어간다. 반복한 횟수만큼 마음이 튼튼한 어른이 되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삶에 그런 옵션 따위 있을 리 만무하다. 더 아파라, 더 겪어봐라하는 심보만이 가득한 것이 보편적인 우리네 삶일 테니. 가끔 찾아오는 행복의 단맛에 더는 아플 일이 없을 거라 여겼던 때에도 성장통은 어김없이 있었다. 도대체 이놈의 아픔은 언제 끝나는 걸까, 내가 아주 죽어야만 끝나는 걸까. 아니, 죽는 그 순간까지도 삶에 뿌린 미련들이 가득해 오히려 온 마음 다하여 아플 것 같다.


어릴 때의 헤어짐은 단지 어제오늘 놀던 친구와 놀지 못한다는 사실이 슬펐다. 마치 지금 이 헤어짐은 당신이 내 삶에서 영영 지워질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으리라.

 

조금 더 살아보니 헤어짐에도 두 가지 유형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먼저 거리로 인한 헤어짐, 그깟 물리적인 거리는 실은 마음만 먹으면 단숨에 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주 없어지거나 영영 사라지는 이별이라면, 이젠 보지도 만질 수도 없는 그 사실이 너무도 슬퍼 밤새 꺼이꺼이 우는 것이었음을.


만약 이 두 번째 헤어짐의 대상이 몹시도 사랑하는 존재라면 그가 머물다간 자리는 공허하다못해 살아가는 동안 메꿔지지 않을 내내 큰 공백으로 남을 것 또한, 나는 깨달았다.


그렇다. 우리는 관계가 끊어지거나 헤어지거나 아주 없어지거나 영영 사라지고 마는, 이 상실과 함께 산다. 다행인 것은 그 큰 공백을 남긴 두 번째 헤어짐 또한 실컷 울고 또 씩씩하게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대체 얼만큼 비어버린 건지 가늠조차 할 수 없던 이별도 결국 그 크기를 명료히 바라볼 수 있는 그 순간이 존재할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종종 나는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한다. 탄생과 동시에 상실의 아픔은 당연한 것임에도 그 아픔을 겪고 울고 보내는 일련의 과정은, 만남에 대한 설렘과 기쁨이 아닌 상실에 대한 여운과 공백만을 크게 만들기 때문에.

오늘도 나는 세상에서 가장 염치없는 기도를 한다.
나에게  어떤 존재와도 상실을 겪지 않게, 부디  소중한 이들과 내내 삶을 살게 해달라고 말이다.
순리를 거스르는 것에 기꺼이 동참해달라 기도하는 내 모습이, 얼마나 염치없는가. 또 얼마나 가여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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