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아들레이드에서 실현한 블루칼라 노동자의 로망
아침잠이 많은 나는 7시에 일어나는 것도 엄청난 의지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7시까지 현장에 도착해야 한다니! 6시쯤 집을 나서면 똑같은 형광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일제히 횡단보도를 건넜다. 공사장에서 일하는 동안 뜻밖에도 출근시간이 가장 행복했다. 졸린 눈을 한 사람들 사이에 그들과 시밀러룩을 입고서 발걸음을 맞춰 함께 걸어본다. 나의 로망을 살고 있는 사람들과 친구가 된 것 같아 혼자 입꼬리가 귀까지 이어졌다. 마침 겨울이 다가오는 계절이라,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 호스텔 공용공간에서 다른 형광색 옷들과 인사하는 것도 좋았다. 미리 정해진 일이 없을 때는 새벽부터 인부를 찾는 문자와 전화를 기다려야 했는데, 그 갑작스러움을 즐겼다. 문자에 첫 번째로 답장을 보내고 3분 만에 머리만 묶고 집을 나서면 서서히 뜨는 해를 보는 것도 나를 생산적인 사람으로 느끼기에 충분했다. 사실 이 시간은 '나에게 아침형 인간이 어울린다'는 헛된 망상을 심어주었다. 얼마나 그 기분이 좋았으면 지금까지도 증상이 남아 이뤄지지 않는 꿈으로 스스로를 꾸준히 괴롭히고 있다.
야외에서 일을 하며 살짝 태닝이 된 내 얼굴은 형광색 옷과 참 잘 어울렸다. 노란색과 주황색 중 그날 기분에 따라, 내 안색에 따라 고르는 재미도 있었다. 아침이면 안전모까지 풀로 장착하고 출근길 OOTD(Outfit Of Today) 사진 하나씩은 꼭 남겼다. 공사장에서 혹시 모를 안전사고를 대비하기 위해 입는 형광색 옷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얼굴을 환하게 밝혀주는 패션 아이템 같았다. 일도 시작하기 전에 미리 사두었던 옷들이었는데, 사실 일을 못 구하게 되면 그냥 입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면 말 다했지!
사실 가장 좋은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머니, 돈이다. 호주머니는 참 달달하다. 정규직보다 비정규직이 시급의 25퍼센트를 더 받고, 공휴일에 일하면 또 그만큼 페널티가 있다. 특히 나 같은 백패커들에게는 평일이 주말이고 그저 주말이 평일이기에 이왕이면 돈을 더 받을 수 있는 주말이 인기가 좋았다. 특히 건설현장은 그 페널티의 비율이 꽤나 괜찮은 직종이다. 주말쉬프트가 필수인 카페나 펍 등과 달리 건설현장은 굳이 주말에 사람이 필요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운 좋게 토요일에 일할 기회가 한 번 있었는데, 시급이 2배였다. 몸이 힘든 만큼 보람이 있고, 보람이 있는 만큼 지갑이 두둑해지는 곳. 하는 거에 비해 넉넉히 버는 easy money였기 때문에 실제로 좀 더 적게 일해도 그저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지금 생각해도 한 번쯤 돌아가고픈 추억이다. 충분히 생산적인 삶을 살지만 여유로웠다. 기술 없는 말단 노동자(labourer)로 아주 힘든 일을 시키는 이도 없는데 그에 대한 보상이 충분하다. 내가 해야 하는 최소한만 해내면 다들 고마워하고 인정을 해준다. 같은 현장에 세 번째 파견임에도 길도 못 찾는 건 당연지사, 사실상 다룰 줄 아는 도구도 없었지만 늘 좋은 평가를 받고 다시 찾는 인력이었던 이유는 내가 즐거워 보이기 때문이었을 거다. 여유로운 사람들만큼 게으른 사람도 많은 호주에서 기본의 기본만 해도 성실한 근무자로 에이전시에 반영된다. 제시간에 나타나기만 해도 이미 반은 한 거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일하기로 한만큼 일하는 건 나 같은 베짱이 나일롱 한국인에게도 너무나도 쉬운 것. 그저 단순한 일상에서 형광색 옷을 입고 새벽을 걷던 기분은 잊을 수 없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