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슬픔을, 불안을 가장 들키기 싫은 사람은 바로 엄마였다. 엄마는 내가 아니더라도 이미 넘치게 힘들었고, 그런 세월을 오래 버텨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친오빠와 나에게 "너희들만 괜찮으면 엄마는 다 괜찮아. 다 좋아."라고 습관처럼 말해왔다. 하지만 난 상대방의 표정, 몸짓, 말투를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습성을 갖고 있었고 엄마의 괜찮다는 거짓말을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하여 곧장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된 엄마. 가장 꽃다운 나이인 20대와 30대에 집에서 우리와 함께해 준 엄마. 위암 수술 후 거칠게 변해버린 아빠의 곁을 지키며 묵묵히 하루하루를 걸어온 엄마. 언제나 겉은 씩씩했지만 속은 닳고 닳은 엄마. 나는 그녀에게 절대로 나의 슬픔까지 얹어줄 수 없었다. 엄마가 나로 인해 더 힘들어지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다행히도 내가 PTSD와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던 때, 일본 도쿄에서 유학 중이라 엄마와 떨어져 있었다. 그러니 더욱 나의 어둠들을 꽁꽁 숨길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2박 3일 정도 시간을 내어 도쿄에 나를 보러 왔다. 괜찮은 모습을 보이려 3일 동안 필사적으로 애썼지만, 평소의 증상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엄마랑 지하철을 타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려는데 갑자기 식은땀이 나면서 쓰러질 거 같았다. 공황장애 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나는 화장실 좀 다녀오겠고 하고 변기에 앉아 조금 쉬다가 도저히 컨디션이 돌아오질 않아, 다시 집으로 가야겠다고 했다. 엄마에겐 그냥 배탈 난 거 같다고 둘러댔다. 집으로 겨우 돌아와 이불에 누워 한참을 쉬었다. 그러고 나서는 엄마가 서울로 돌아갈 때까지 꽤나 잘 참았는데, 마지막 날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엄마를 공항 가는 버스까지 모셔다 드리는 데 공황장애 증세가 또 찾아왔다. 식은땀이 나며 온몸이 떨리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거 같았다. 버스정류장 화장실에 도착하자마자 엄마에게 애써 웃으며 화장실이 급하다며 사라졌고, 변기를 붙잡고 구토를 했다. 금방 버스가 올 거 같아 얼른 정신을 붙들고 나와 엄마에게 활짝 웃으며 잘 가라고 인사를 했다. 엄마는 나의 놀라운 연기력에 마지막까지 눈치채지 못하고 무사히 서울로 돌아갔다.
이렇게까지 들키기 싫어한 내가 모든 걸 내려놓게 된 순간이 있다. 도쿄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잠시 엄마 집에서 생활하던 때의 일이다. 엄마, 아빠는 두 분 다 회사를 다니셔서 저녁까지 집에 혼자 있었다. 당시 우울감이 더욱 깊어져 무척 지친 상태였던 나는 눈을 떠보니 응급실이었다. 그리고 내 옆엔 엄마가 있었다. 너무 죄송해서, 죄스러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나에게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퇴원을 하고 집에 와보니 엄마와 아빠 얼굴이 하루 사이에 10년은 늙어있었다. 우리 셋 다 볼이 푹 파여 수척해질 대로 수척한 상태였고, 서로 눈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바로 눈물이 줄줄 흐르는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장 들키기 싫은 순간을 가장 들키기 싫은 사람에게 보인 나. 그날 이후로 모든 걸 내려놓게 되었다.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너무 힘을 주고 혼자 감당하려 했던 나에게 '이제 그만해.' 하며 누군가 어퍼컷을 날린 기분이었다. 그리고 조금씩 나의 마음 안에 있는 어둠들을 엄마에게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불효할 걸 알았더라면, 그냥 엄마한테 좀 더 칭얼거리기도 하고, 솔직하게 대화도 할 걸 후회도 된다. 난 나를 파괴해 가면서까지 무얼 그토록 참고 또 참고 숨기고 또 숨겼던 걸까. 뚝뚝 끊긴 시간들을 꿰매고 있는 지금. 일어난 일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으며, 꿰맨 자국은 영영 사라지지 않겠지만, 그 시간 속에서 배운 것들 역시 깊이 새겨져 잊히지 않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