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통

by 더여린

상담 치료가 있는 날이었다.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하던 길,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졌다. 자주 있는 일이라 어색해하지 않고 남편의 어깨에 폭 기대어 갔다. 병원에 도착하면 회색 공기가 여기저기 지나다닌다. 특히 정신과는 불안하고 초조한 사람들과 너무나도 지쳐버린 사람들의 한숨으로 더 불투명하며 무거운 공기가 흐른다. 어떤 사람은 진료를 기다리는 동안 다리를 덜덜덜 떨고, 또 어떤 사람은 넋이 나간 채로 허공을 바라보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린다. 나 역시 그곳에서는 환자라 너무 기운이 없을 땐 남편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겨우겨우 순서를 기다렸다. 그래도 다행인 건 아픈 사람들끼리는 아픈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서 ‘왜 저렇게 다리를 떨지?’, ‘저 사람은 무슨 한숨을 저렇게 푹푹 쉰 대?’, ‘대기하면서 왜 반쯤 누워있는 거야?’ 등의 질문을 떠올리지 않는다. 그저 ‘아, 저 사람 오늘은 조금 더 불안한가 보네.’, ‘오늘은 더욱 기운이 없나 보다.’라며 반쯤 풀린 눈으로 서로를 위로한다.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상담 선생님은 늘 웃으며 나를 맞이해 주셨다. 매번 갈 때마다 상담 주제가 바뀌는데 이날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 중 가장 가슴에 남은 말이 있다.


“아픈 시간 동안 멈춰있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여린 씨는 분명 아파하는 시간들을 견뎌온 것만으로도 엄청난 성장을 하고 계셨을 거예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 너무 조급해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이 말을 듣곤 튀어나오려는 눈물을 꾹꾹 막았다. 병과 싸워오며 미뤄 둘 수밖에 없었던 일들이 너무 많았다. 친구들과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나누며 웃는 일, 사랑하는 이들을 돌보는 일, 그림을 더 제정신에서 바로 잡고 그리는 일, 글을 꾸준히 쓸 수 있는 체력 등 너무나 놓쳐온 것들이 많다고 느꼈다. 그 시간만큼 뒤처져 있고 멈춰 있다고 여겼다. 이런 나에게 ‘아픔의 시간들을 견뎌온 것만으로도 엄청난 성장을 해온 것.’이라는 이야기는 봄바람만큼 신선했고 위로가 되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그때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들이 괜한 위로가 아닌 진실이었음을 깨닫는다. 아픔의 시간을 오래 견디고 이겨낸 만큼, 성장통만큼, 나는 깊이 성장했다. 스스로에 대하여 무지했던 내가, 지금은 나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나의 마음을 그 누구보다 귀 기울여 들어주고, 이해해 주고, 칭찬해 주고, 달래도 주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무엇보다 인생에서 내게 무엇이 중요한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계속해서 소통하는 상냥한 사이가 되었다.


누군가 나에게 "그럼 다시 그 고통의 시간들을, 성장의 시간들을 또 겪으라면 겪을 수 있겠어요?"라고 묻는다면,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답하겠다. '한 번 겪어 본 거 두 번은 더 잘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라며 잠시 강한 척을 해보았다가도, 그때만큼 더 잘 버틸 자신이 없다. 그만큼 나의 인생을 위해 죽기 살기로 버텼던 짙은 시간들이었다.


깊이 내려갔다면 깊이 올라갈 것이다. 거센 성장통은 위대함을 낳는다. 오랜 시간 버텨준 나에게 참 고맙고, 좀 더 일찍 들여다보지 못해 미안했다고,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장하다고 이야기해 주고 싶은 밤이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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