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껏해야막연히 사람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정도뿐이었다. 사람을 좋아해서 방송국 PD 또는 기자 정도는 생각한 적은 있다. 그러나 모두 막연한 생각일 뿐이었고구체적으로 내 안에 '꿈'이라는 것은 한 번도 와닿은 적이 없었다.
20대 초반까지는 꿈이 없어도 괜찮았다. 당시 우리 집은 잘 사는 편이었는데 그 덕에 불안함이나 조급함을 느껴본 적 없었다. 그래서인지 더욱 미래를 고민하지않았다.
그렇게 곱게 자라던 인생이 송두리째 뽑혀버렸다.
대학교 2학년을 보내던 중, 모든 일을 자세히 말할 순 없지만 우리 집은 아주 큰 사기를 당했고, 그것을 시작으로 줄줄이 문제가 터졌다.
온실 속 화초였던 내 인생에 칼바람이 불었다. 흙이었던 땅은 걸음마다 깨져버리는 살얼음판이 되었고, 가장 사랑하는 부모님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만 보던 나는 불안장애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렇게 인생이 뒤바뀌어 버린 시간이었다.
방황하기 시작했다. 무엇으로 먹고살아야 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깨져버린 인생이 두려워 앞을 내다보기도 어려워 숨어있었다. 그렇게 22살이 되기까지 약 6개월 동안 방황을 했다.
문득 검찰, 법원은 뭐 하는 곳인가 궁금해졌다.
어머니는 이 일로 법원을 자주 왕래했는데그게 계기가 되었다. 가방에 노트 하나 넣고 지하철로 서초역으로 갔다. 서초역에는 대법원, 대검찰청, 서울중앙지방법원,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이 모두 한 곳에 모여있었다. 건물이 참 높았고, 차가웠으며, 웅장한 느낌이었다. 모두 들어가 봤지만마음에 와닿지는 않는 차가운 느낌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경찰서도 가봐야겠다 싶었다.
당시 우리 집 앞에는 서대문경찰서가 있어서 바로 가봤다. 건물에 들어서니 현관을 지키던 경찰관이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냐길래형사과를 들어가 보고 싶다고 했다. 신고하러 오셨냐길래 그런 건 아니고, 그냥 형사과가 궁금해서 들어가 보고 바로 나오겠다고 했다.
그때부터 경찰관이 나를 의심했다. 아마 기자로 생각했던 것 같다. 이렇게 막 들어오시면 안 된다면서 나가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형사과 한 번만 구경하겠다 했고, 경찰관은 이러시면 안 된다면서 내가 서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결국 쫓겨나기 일보 직전 화장실 한 번만 쓰고 나가겠다고 했다.
놀란 마음을 잡고 경찰서 1층 화장실에 쪼그려 앉았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그런데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머릿속에 섬광처럼 무언가 스쳐 지나갔고 확신할 수 있는 감정을 느꼈다. 처음 느껴 본 감정이었다. 머릿속에 계속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집에 가자마자 엄마한테 말했다. "나 경찰 할래"
그렇게 다니던 학교를 휴학하고서 노량진으로 갔고, 시간이 흘러 합격한 뒤 서대문경찰서로 발령이 났다. 그렇게 나는 경찰관으로 새 삶을 살기 시작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순수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섬광처럼 느껴진 그 기분은 운명처럼 느껴진 순간이었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분명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경찰관으로 일한 지 벌써 8년 차가 되었다. 일이 마냥 좋은 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말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럴 때, 힘들었던 시기와 경찰이 되고 싶었던 간절함을 다시 떠올리면 마음을 조금은 다시 다잡게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우리 가족 또한 한 때 피해자였기 때문에, 지치는 날에도 피해자가 우리 엄마 아빠라고 생각하면 나는 계속해서 달릴 수밖에 없다. 너무나도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그래도나는 조금은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그런 일들이 한 번씩은 있는 것 같다.
꿈이 없던 나에게,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신 것처럼, 신께서 내게 길을 알려주셨던 것 같다.
어떠한 일을 하던 각자에게 그만한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경찰이라는 직업이 운명처럼 다가왔듯, 꼭 어떤 스토리가 있지 않더라도, 우리가 이 일을 선택하고 하는 이유는 알게 모르게 어떤 이유가 작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각자가,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뜻에 맞게,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어디엔가 반드시 의미가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