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지의 『야생』을 읽고
다가가기 위해 더듬이를 세웠으므로, 매 순간이 새싹이었다.
나의 시, 나의 실천. 이루었거나 못 이룬 진수들. 미완성인 채로
언제 손을 놓아도 억울할 것 없을 포트폴리오다.
- 2022년 가을, 이향지
42년생, 그녀가 여든의 나이에 출간한 시집, 『야생』을 읽었다. 첫머리에 실린 ‘시인의 말’을 보는 순간 아, 하는 탄성이 절로 터졌다. 매 순간이 새싹이었다니. 언제 손 놓아도 미련 없을 포트폴리오를 가졌다니. 훗날 내가 시인의 연배에 들었을 때 저리 호방하게 말할 수 있으려나. 한평생 시인의 더듬이는 무엇을 향해 있었을까.
휘늘어진다는 것 배배 꼬인다는 것 보였다 안 보였다 출렁거린다는 것 대책 없이 후끈 달아오른다는 것
……
길은 어디에나 없는 편이 가장 좋은 것이며
무엇을 보았는가 무엇을 들었는가 무엇을 맡았는가 무엇을 만졌는가 어디로 가던 길이었던가
묻지 않아도 다 아는 길은 가지 않는 편이 더 좋은 것이며,
부딪쳐서 깨어지면서 피 흘리면서 스스로 아물면서 아는 것
……
길들지 않으려고 끝끝내 달아나는
생긴 그대로를 풀어놓고 출렁거리고 휘청거리는 한때가
필요한 것이다 누구에게나
-「야생」中
‘시인의 말’에서 느껴졌던 호기로움이 표제작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날것의 펄떡임이 한없이 긍정되는 세계 속에 불현듯 무방비로 내던져진 느낌. 길들여지지 않은, 순치되지 않은 야생의 생기가 오롯이 충만하다. ‘휘늘어지고 배배 꼬이고 출렁거리고 후끈 달아오르는’ 중에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묻지 않아도 다 아는 길’은 안전하지만 고루할 것이며, ‘어디에나 없는’ 길은 숱한 시행착오와 ‘피’를 동반할 테지만 나를 더욱 여물게 할 것이다. 무엇을 택할 것인가. 나는 무엇을 택해 왔는가. 내게 야생의 ‘한때’는 언제였을까. ‘부딪치고 깨짐’을 최소화하기 위한 선택들이 삶의 반경을 시나브로 좁혀왔을지도.
사탕을 왜 지냅니까, 순두부가 물었다
사탕을 왜 지내다니, 생두부가 물었다
콩나물과 비지와 콩자반은
피야, 피야, 떠들며 고도리만 쳤다
아버지 사탕에 어머니 사탕을 왜 합칩니까,
덜 끓은 청국장이 물었다
아버지 사탕에 어머니 사탕을 왜 못 합치니,
눅은 된장이 물었다
질문 중에 투다다닥 콩깍지가 터져
웅기중기 음복했다
사탕을 제사로 바꾼다
-「콩의 자식들」
웃음이 터졌다. 제사를 사탕으로 바꿔놓은 능청이라던가, ‘콩가루 집안’이라는 죽은 비유를 절묘하게 되살린 기지에 감탄이 쏟아질 따름. 순두부와 생두부, 콩나물과 비지와 콩자반, 덜 끓은 청국장과 눅은 된장까지. 본(本)은 같아도 그저 그뿐인, 결국은 타(他)인 것이 또한 가족일 테니까. 더군다나 제사를 명목으로, 내키지 않는 회동에 억지 걸음을 한 누군가가 있다면야. 시인의 위트가 음복보다 복되다.
나는 오늘 새벽에, 얼굴을 몽땅 잃었다네
진작부터 깨어 있었으나, 잠의 여운에 젖어
숨 쉬는 자루처럼 바라만 보고 있었다네
내 얼굴에서 떠오르는 내 얼굴들의 행렬을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만들며 떠나는, 투명한 가면들의 행렬을
어둠의 싹들을 깨우지 않으려고 바라만 보고 있었다네
……
나의 무엇이 너희들의 새벽을 겹겹으로 일으켜
어둠에서 어둠으로 떠나보내고 있니? 나는 무르지 않았다네
그것들의 파편에 묻힐 것이 이별보다 두려웠다네
오늘 새벽, 내 얼굴보다 아끼던 가면을 모두 잃었다네
나는 그것들을 씻기고 도닥거리느라 청춘을 허비했네
새벽의 벽이 무너지고, 주름에 덮인 맨얼굴을, 지금 쓰다듬고 있네
-「새벽의 행렬」中
앞선 시들은 이 시가 쓰인 이후에 쓰였을 것이다. 그냥 순전히 내 생각이다. ‘씻기고 도닥거리느라 청춘을 허비하게 했던 가면들’을 모두 벗어던진 후, ‘주름에 덮인 맨얼굴’을 하고서 치열하도록 생생한 시들을 토해내는 시인의 모습을 상상한다. 에필로그에서 시인은 또 한 번 말한다. ‘지금’은 언제나 새로 돋는 잎이라고. 나는 ‘지금’의 축적이라고. 시인의 말대로 삶에서 ‘지금’이란, 지나온 ‘지금들’의 응축이다. 잃어버린 게 아니라 부러 떠나보낸 가면들, 기억 저편의 ‘지금들’이 ‘지금’의 새싹을 틔운다. 매 순간이 새싹이라면 늙는 것도 두렵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