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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 Jul 20. 2023

모름의 거리, 모름의 축복

유홍준의 『너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은 축복』을 읽고



  자주 코피를 쏟았다

  책을 읽다가 쏟았고 밥을 먹다가 쏟았다

  괜찮다고 했다

  아니다 아니다 말을 하면 피가 더 난다

  피가 나면 피가 멎을 때까지, 어머니는 말을 하지 말라고 했다

  피가 나면 피가 멎을 때까지……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녀와 헤어졌을 때도, 직장에서 쫓겨났을 때도, 나는 이 방법을 썼다

  피가 나면 피가 멎을 때까지

  눈 감고

  피 삼키고

  가만히 누워 기다리기만 했다

  입 안 가득 피가 고이면 꿀꺽, 내 피를 내가 삼키며 누워 있기만 했다

                                                     -「피가 나면 피가 멎을 때까지」


  나도 어린 시절 자주 코피를 쏟곤 했다. 불현듯 뜨끈하고 비릿한 액체가 목구멍으로 울컥 넘어갈 때면, 그게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코 안 깊숙이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피가 샘물처럼 퐁퐁 솟구치고 있을 거라는 상상에 이르면 당최 진정이 되질 않았다. 울고불고 호들갑을 떨어대느라 코피 한 번 쏟을 때마다 녹초가 되기 일쑤였다. 그래서였을까. 이 시를 한참동안 곱씹었다. 코피를 대하는 자세가 이토록 상반되다니.

  아니다 아니다 말하지 않는 것, 가만히 누워 기다리는 것, 입 안 가득 피가 고이도록 내버려뒀다가 꿀꺽, 삼켜내는 것. 지금의 내게도 여전히 어려운 일이지만 이것만큼은 알 것도 같다. 내 몫의 슬픔이랄까 아픔 같은 것들, 그건 오롯이 내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 삭이고 삭여서 결국 나의 일부로 품어내야만 한다는 것을. 말을 삼키듯 홀로 피를 삼켜내야 하는 쓸쓸한 삶의 진리가 휴지를 적시던 붉은 색채의 공포로 선연하게 다가온다.



  산길 갈 때

  이파리 다 떨어지고 없는 싸리나무 숲 지날 때

  사람이 사람에게 너무 가까이 붙어 갈 때


  뺨을 맞는다 채찍을 맞는다 뒤에 선 사람은 앞에 선 사람이 스치고 간 가지에 호되게, 눈물이 찔끔 나게, 나  뭇가지 싸대기를 맞는다


  너무 가까이 붙지 마라

  뒤에 오는 사람 때리지 마라

  

  선암사 뒤 겨울 조계산이 싸리나무 회초리 일만 개를 숨겨 놓고 설법을 한다

                                                            -「싸리나무 설법」


  관계에 대한 이토록 지혜로운 설법은 보지 못했다. 너무 가까이 붙지 말 것, 뒤에 오는 사람 때리지 말 것. 이 두 가지 외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요즘 들어 계속 생각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나와 너의 거리’다. 나와 배우자, 나와 아들, 나와 부모, 나와 학생들. 내 주변의 타인들과 나는 얼마큼의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가. 얼마큼의 거리가 나와 너를, 그리고 우리를 무사히 상생하게 할 것인가. 시인이 발견한 싸리나무 설법 덕에 해답을 조금씩 찾아간다. ‘너무 멀어서’ 보다는 ‘너무 가까워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을. 나뭇가지 싸대기의 반경 정도는 거리를 벌려 두어야 서로에게 생채기를 남기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네가 묻는 모든 걸 나는 모른다

  내가 묻는 모든 걸 너는 모른다

                                           - 「반달」 


  시집의 맨 마지막에 실려 있는 시다. 시집 제목과도 상응한다. 너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 네가 묻는 모든 걸 나는 모른다는 것, 고로 우리는 서로를 미처 다 알지 못한다는 사실. 모름이 내포하는 거리, 모름을 인정하는 자의 겸손, 그로 인해 우리가 누릴 축복 같은 것들이 이 시 하나로 한껍에 밀려드는 느낌이었다. 제목마저 절묘하다. 서로 이어져 있지만, 어쩌면 하나일 테지만, 명암의 경계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타자일 뿐. 결코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는, 제각기 홀로 피를 삼켜야만 하는, 따라서 반복적으로 다가가고 멀어지는 것만이 가능한, 그런 영원한 타자 말이다. 모름의 미학이 섬묘한 달빛처럼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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