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가 지저귀는 것을 ‘노래’에 빗대는 건 익숙한 치환이지만, 새를 ‘가객’으로, 나무를 ‘노래방’으로,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모습을 ‘마이크 테스트’를 위한 것으로 표현한 데선 미소 짓지 않을 수 없다. 옥매를 심는 것은 ‘듣기 힘든 귀한 소리를 공으로’ 듣기 위함이라지만, 거저라기엔 품이 꽤 드는 듯하다. 적당한 자리를 보아 나무를 옮겨 심는 과정 자체가 만만치 않을뿐더러 개미와 벌레와 구름의 정성도 보태져야 가능한 일이므로. 나무가 새 땅에 적응할 때까지,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고 떡잎을 틔울 때까지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한 건 당연지사.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일에는 자연 설렘이 동반된다. ‘두근거리는 며칠’동안, ‘가지의 멍울들이 음표처럼’ 보이는 동안, 화자는 얼마나 애타고 설레었을까.
‘내게 한 사람이 오는 일이 그와 같았으니’라는 구절을 본 순간,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했던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 떠올랐다. 사람이 온다는 건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즉 ‘한 사람의 일생’이 오는 것임을, 그리하여 그를 맞이하는 자세는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을 기꺼이 더듬어보려는 ‘환대’여야 한다는 것을. 새 한 마리 모시는 데에도 이토록 많은 궁리가 필요한데 하물며 사람이야. 환대의 자리에 서있는 이들 덕에 절로 마음이 누그러진다. 끝내 새 한 마리 날아오지 않는다면 나라도 가서 한 곡조 뽑아줘야지.
한 해 전 합천 읍내에 시 낭송 초청받아 내려갔을 때
연예인이라도 만난 듯 사진을 찍고 사인을 받고
야유가 아닌가 싶게 요란하게 휘파람까지 불던 청년
행사 마치고 노모까지 모시고 나와서
자랑스럽게 기념촬영을 하던 사람
마음이 아픈 아니 이해하이소, 주최측에서도 못마땅해 하였으나
어느 행사장에서도 나는 그런 환대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 「광기는 어떻게 세계에 복무하는가」 中
‘마음이 아픈’ 청년의 행동을 결례로 여기고 그를 못마땅해 하는 주최측과는 달리 화자는 그의 행동을 ‘환대’로 받아들인다. 그의 광기, 요란스러움, 과잉 행동은 뭇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지만, 화자는 그에게서 악의 없는 천진함, 날것의 환대를 발견한다. 그의 광기가 이 세계에 복무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마음이 안 아픈’ 자들은 그가 보여준 ‘그런 환대’를 오롯이 베풀 수 있을 것인가. 전에 없던 환대를 받아 본 화자는 아마도 되돌려 줄 것이다, 마주한 광인 그리고 또 다른 누구에게도.
꽃이 없을 때 나무의 이름을 알 수가 없다면
나무를 보지 못한 거다
늘 꽃일 수는 없으니까.
열매도 보고 수피도 찬찬히 뜯어보는 거지
같은 초록도 색조가 바뀌어가는 걸
따라가보는 거지
꽃말을 지워보렴 차라리
라일락의 우정과 코스모스의 순정과
영산홍의 첫사랑을 놓아주니
뜻밖에, 홀가분해진 건 나
이름에 가려져 있던 이목구비가 찬찬히 눈에 들어온다
찾지 못한 꽃이 잎과 잎 사이의 하늘처럼 하늘거린다
저 무수한 틈새가 마지막 잎새가 아니겠는지,
저 의미심장을 심장 두근거리는 소리로
머리카락을 내민 채 숨는 숨바꼭질이 있다
― 「숨은 꽃」
첫 연부터 강렬하다. 단호한 전언에 괜스레 움츠러든다. 그래, 어쩌면 눈에 띄는 일부만 가지고 상대를 공히 안다고 착각했던 건 아닐는지. 꽃에 가려 보이지 않던 항시적이고 고유하며 자잘한 것들이 꽃이 숨은 틈을 타 비로소 존재감을 드러낸다. 아니, 그들은 늘 그곳에 있었는데 내 시선이 미처 머물지 못했을 뿐. 정성 들여 오래 관찰해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나태주 시인이 「풀꽃」에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라고 말했듯이.
꽃들도 어깨가 무거웠으리라. 꽃말이라는 등짐을 지고 하나의 상품이 되어야 했을 테니. 이름을 지우고 쓸모를 지우고, 내민 얼굴 그대로 보이는 얼굴 그대로 마주하는 것이 환대가 아니면 무엇이리. 잎과 잎 사이의 하늘, 그 무수한 틈새에서 숨은 꽃을 보고 마지막 잎새를 찾는 것, 조건 없는 환대를 통해 누릴 수 있는 두근거림이 우리를 환대의 자리로 초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