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기록 그리고 출발
밤은 금세 찾아왔다. 구시가지 광장 근처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이미 해가 저물어 있었다. 야경을 보기 위해 카를교로 향했다. 아내 표현대로, 다리가 무너질 정도의 많은 사람들이 카를교를 차지하고 있었다. 해가 저물어 공기가 제법 선선해져야 하는데도, 빽빽하게 뿜어 나오는 체열은 시원함을 몰아내고 있었다.
쫓기듯 다리를 벗어나니 한적한 곳이 있었다. 잠시 걸터앉아 한숨 돌리고는 풍경을 감상했다. 블타바강의 야경은 화려하다. 그러나 소란스럽지 않다. 오히려 아득한 느낌마저 준다. 야경의 힘은 빛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엄청나게 밝거나 강한 색깔의 빛을 사용하면 화려함을 쉽게 얻을 수 있지만 그만큼 질리기가 쉬워진다. 밤의 주인이 빛이 아니라 어둠인 것처럼, 야경 속의 빛 또한 어둠의 한 부분인 듯 조용하고 나직하게 한 곳을 비추면 의외로 분위기 있는 야경이 만들어진다. 번쩍거리는 다리와 형체만 보이는 다리, 그 사이를 흐르는 물빛에 흔들리듯 어리는 불빛들과 어슴푸레하지만 밝은 그림자의 프라하성. 서울의 한강과 비교하면 개천 수준의 블타바강이지만 그래서 그 야경이 아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트램을 타고 숙소로 들어왔다. 해는 져서 어둡고 찾아오는 사람 없을 외곽에 잡은 숙소였지만 공교롭게도 기차역 근처였다. 게다가 꼭대기 층에 에어컨이 없으니 뜨거운 공기가 오갈 데 없는 사람처럼 방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창문을 열면 규칙적인 기차 바퀴 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들려왔고, 닫으면 온몸이 열기로 가득 찼다. 아내와 열띤 논의(?) 끝에 더위 대신 숙면을 포기하기로 했다.
해는 금방 떠올랐다. 잠이 들기는 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프라하성으로 향했다.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성 비투 대성당, 애니메이션을 실제로 보는 듯한 황금소로와 중간중간의 독창적인 건축물들이 시선과 발길을 붙잡았다. 하지만 너무 더웠던 탓일까 정수리에서 계속 흥건하게 땀이 흘러내렸다. 부랴부랴 가까운 레스토랑에 들어가니 다들 차가운 음료를 연신 들이키고 있었다. 갑자기 생긴 메뉴인 것 같은 차가운 레모네이드를 시켜 몇 잔을 마시니 땀이 좀 진정됐다. 간만에 더위란 걸 제대로 먹을 뻔했다.
프라하성을 나와 다시 카를교를 건넜다. 낮에 보는 카를교와 블타바강도 좋았다. 더운 날씨 덕에 사람이 많지 않아 한결 여유로웠다. 맑은 날씨, 한적한 강 그리고 붉은 지붕으로 뒤덮인 도시는 파리나 로마처럼 강렬한 볼거리가 없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프라하를 방문하게 만드는 이유였다. 프라하에서는 웨딩 사진을 새벽의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카를교에서 찍는 것이 유행이라는데, 더위와 잠에 시달리다 포기해버린 새벽시간이 못내 아쉬웠다.
예전보다는 많이 오른 상황이지만, 그래도 프라하의 물가는 환율을 감안하면 다른 곳 보다 저렴했다. 다른 곳을 지낼 때처럼 환전한 덕분에 떠나는 전날은 이것저것 기념품을 살 수 있었다. 아내가 좋아하는 목각인형과 마그넷, 수첩 등등을 사고, 여행 초기보다 늘어난 짐을 담을 커다란 배낭도 샀다. 숙소로 돌아와서는 본 적도 읽을 자신도 없는 서로 다른 세 종류의 맥주를 사서 아내와 나눠 마셨다. 경험했던 모든 것을 기억해야 하는 부담을 가지지 않으려고, 가장 맛있는 맥주 하나만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한국에 와서야 이 맥주도 수입이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내가 마셨던 것과 똑같은 형태는 아직 발견하지 못 했다.)
계획했던 일정의 3분의 2가 흘러버렸다. 꿈처럼 느껴질 수 있는 여행의 시작은 사실 그저 덤덤한 현실이었다. 하지만 돌아갈 날짜가 손에 잡히기 시작할 무렵, 나도 모르게 남아 있는 시간이 깨지 않을 꿈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도 내일은 새로운 도시다. 다시 기차를 타기 위해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