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쓸데없는 걱정이다.
처음 에어비앤비를 통해 구한 숙소. 그 곳을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소매치기가 많다는 몇몇의 지하철역들. 다가올 12시간여의 비행 앞에서 사실 필요 없는 생각이었다. 공항에 일찍 도착해서 구할 수 있었던 비상구 자리에 앉았음에도, 한 시간도 제대로 못 잔 채 파리에 도착했다.
확실히 10년이라는 시간이 가져다주는 변화는 존재한다. 10년 전에도 이렇게 12시간여를 뜬눈으로 보내다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던 것처럼 똑같이 파리에 도착한 나였지만, 몸은 확실히 그때보다 더 힘들고 정신은 그때보다 여유가 있었다. 그때는 생존이라는 단어에 대한 강한 집착으로 몸을 팔팔하게 이끌 수 있었다면, 지금은 한 번 와봤다는 경험이 긴장감을 떨어뜨려서 온몸이 쑤셔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른여섯이라는 숫자를 대부분의 한국 사람이 듣게 되면 똑같은 반응을 할 것이다. 나이.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상황에 서른여섯 가지의 보기가 주어지는 경우는 사실상 없으며,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숫자 중에 열을 넘어가는 경우는 키나 체중 같은 신체 사이즈 아니면 대부분 돈 혹은 시험성적과 같은 것이다. 그중에 서른여섯이라는 숫자는 너무 작아서 실제 존재한다 해도 너무 민망해하며 사용하지 않거나 원래 숫자를 줄인 표현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이 모든 가능성이 존재함에도 놀라운 것일까? 대부분의 한국 사람은 서른여섯이라는 숫자를 듣는 순간 나이, 그것도 이 숫자를 말한 사람 혹은 그와 관련된 사람의 나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스물여섯에 유럽으로 한 달 동안 여행을 떠난다고 하면 조금은 나이가 많다고는 하겠지만, 그래도 이십 대의 청춘으로 한번 해볼 만하다고 주변에서 말리기보다는 추천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더 큰 세상을 보라고 하며 그리고 앞으로 이런 식으로 길게 여행을 다닐 수는 없을 거라며, 덕담인지 서글픈 예언인지 분간이 애매한 말들이 많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서른여섯에 직장을 그만두고 와이프와 함께 한 달 동안 유럽으로 여행을 떠난다고 하면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할까? 사실 직접적으로 무엇이라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있어도 대부분이 부럽다는 반응 그리고 ‘이 사람 무엇인가 특이하다’는 인식이 느껴지는 말 없는 표정.
서른여섯이라는 숫자는 사실 직장에서는 소위 말해 한창 구를 때이고 날아다닐 때이며, 가정에서는 이제 막 결혼을 했거나 애를 막 낳았거나, 혹은 그와 관련된 활동을 하라고 재촉받는 그야말로 바쁜 숫자다.
나 또한 그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생활인이다. 이 여행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직장을 그만두고 한 달 동안 집을 떠나 돌아다닌다는 건, 마음 한 구석에 불안함을 계속 품고 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경제적인 생활의 문제에서부터 ‘나’라는 사람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까지, 마음을 잘 다독여도 불쑥불쑥 그런 걱정들은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마음속에서 떠돌아 다녔다. 끝을 알 수 없는 길을 가겠다고 나서는 것은, 진정 누구나 젊다고 말할 수 있는 20대 혹은 30대 초에나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인 것 같았다. 심지어 요새는 그런 특권마저도 빛이 많이 바랬지만, 나에게는 그런 빛바랜 특권의 소유자가 되는 것조차 버거운 일처럼 느껴졌다. 단지 서른여섯이라는 숫자가 가져다주는 무게감 때문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처음 입사할 때부터, 정년이 보장되고 높은 연봉을 주는 직전의 회사를 계속해서 다닐 마음은 없었다. 회사가 너무 싫어서라기보다는, 그래도 세상에 태어나 인생이라는 것을 보내는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이라는 현실적 문제의 해결과 그리고 소위 말하는 ‘회사를 다닌다’는 경험은 나에게 필요한 것이면서 유용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늦어지기 전에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취업을 선택했고, 그렇게 6년 반이 흘렀다. 사실 회사를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가까운 주변 사람들에게는 ‘짧으면 5년 길면 10년’이라고 회사 생활의 기간을 이야기했고, 대다수는 그 말을 듣고는 가볍게 웃어 넘겼다. 그리고 1년 정도 있다가 나는 결혼을 했고, 더 많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민의 주제는 당연히 회사를 그만두고 ‘무엇을 할 것인가’였다.
내가 항상 하고 싶은 일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었다.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인가? 무엇을 해도 가능할 것 같았고, 무엇을 해도 안 될 것 같았다. 일단 떠나자.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이유는 없었다. 지금 생각나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겪어보고 생각해도 좋을 일이었다. 10년 전 군대를 제대하고 두근거리면 떠났던 유럽에 다시 가 보고 싶었다. 아직 한 번도 유럽에 가 보지 않은 와이프에게 유럽을 보여 주고 싶은 마음도 많았다. 그리고 궁금했다. 10년 만에 그 곳에 갔을 때 나는 어떤 다른 생각을 하게 될까? 무엇을 세세하게 얻어 오겠다는 다짐보다 그냥 가 보고 싶으니 한번 가보자는 마음으로 떠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여행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