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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원 Jan 14. 2016

브뤼셀 #1
-첫인상의 중요성-

여행, 기록 그리고 출발

꿈을 꾸었다. 브뤼셀로 향하는 기차에서 남자는 어젯밤 꿈을 기억하기 위해 애썼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불안함이라는 느낌은 명백한 꿈. 머릿속에는 벨기에가 인종차별이 심하다는 이야기가 찜찜하게 남아있다. 도착한 브뤼셀 남역 주변은 낡은 집들이 대다수였다. 플랫폼에 드문드문 보이는 사람 중에는 심상치 않아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원래 이런 곳인가 하는 걱정에 만일의 사태가 있을까 하는 마음에 남자는 캐리어를 꼭 쥐어본다. 괜스레 여자가 자신의 곁에 가까이 있는지 확인해본다.


지하철을 타고 내리기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예약해둔 호텔이 표시된 스마트폰을 이리저리 돌려 보며 걸음을 옮겼다. 지하철 역 하나 정도의 거리를 걷고 나서야 반대 방향이 호텔임을 확인했다. 부랴부랴 호텔에 들어갔다. 체크인을 하며 궁금한 마음에 브뤼셀 숙박 시설에 머물 때 내야 하는 시티 택스를 언제 내느냐고 물었다. 굳이 먼저 물어볼 필요는 없었던 것인가? 아니면 그냥 동양인 커플이 물어봐서 인가? 호텔 직원은 너무나 사나운 눈빛으로 “Now!"를 외쳤다. 열쇠를 줄 때까지도 별 이야기를 하지 않더니만 누가 보면 한바탕 말싸움이라도 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현금을 꺼내 주고는 방으로 올라갔다. 남자는 방에 도달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탄 여자의 얼굴은 불만이 가득했다.      


 “진짜 XXX야!”

 “어?”

 “우리한테 그래 놓고 바로 다음 손님한테는 웃으면서 친절하게 굴잖아.”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백인 남자가 한 명 있었다.     


 “진짜 마음에 안 드네. 여기. 벌써 다른 도시 가고 싶어.”

 “.......”     


남자도 기분이 안 좋았지만  달리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살다 보면 그런 날들이 있으니까 하고 그냥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저 운이 나쁜 것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짐을 대충 풀고는 물과 간단한 요깃거리를 사기 위해 근처의 마트로 향했다. 주택가 사이 드문드문 자그마한 상점들이 있었다. 발음할 자신이 없는 알파벳들과 여러 대의 세탁기가 보였다. 쌓여 있는 빨랫감을 처리할 좋은 장소였다. 알파벳 대신 숫자와 화폐 표시는 뚜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짐을 풀 동안 읽었던 호텔 소개에 세탁 서비스가 있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먼저 호텔에 물어봐야겠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의외로 여러 종류의 컵라면을 발견한 남자와 여자는 기꺼운 마음으로 라면들을 샀다. 한국을 떠난 지 3주가 지난날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호텔 카운터에서 남자는 직원에게 물어봤다.  체크인할 때와는 다른 직원이었다. 세탁기를 사용할 수 있는지 그리고 가능하다면 가격은 얼마인지. 그리고는 모두 안 된다는 대답을 들을지 몰라 세탁 서비스의 가격도 물어볼 생각이었다.     


 “No!"     


남자는 귀를 의심했다. 남자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외마디처럼 들려온 직원의 대답이었다.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것에 관해 지금껏 큰 어려움이 없었던 남자에게는 기분 나쁜 응대였다. 언어가 통하지 않은 사람 사이의 소통이라도 감정은 명확하게 전달된다. 남자는 화를 잘 내지 않는다. 대신 화를 내면 정말 작은 것이라도 지긋지긋하게 물고 늘어진다. 여자가 남자의 팔을 잡았다.     


 “그냥 가. 괜히 힘 빼지 말고.”


남자는 화가 났지만 여자의 말이 맞았다. 영어로 따져본들 그들은 상대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브뤼셀 진짜 별로야. 아까도 그렇고 이번도 그렇고 어떻게 호텔에 일하는 사람들이 다 그럴 수가 있지?”     


여자는 두 번의 경험에 브뤼셀을 정의해버렸다. 그런데 남자도 부정할 수 없었다. 흔히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이야기하지만, 연속해서 겪은 비슷한 일을 일반화하지 않는 경우도 드물다. 


저녁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가까운 곳에서 먹으려고 했는데 걷다 보니 브뤼셀의 상징이라는 오줌싸개 동상까지 와 버렸다. 정말 작은 동상 하나뿐이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진을 찍고 있어 근처까지 접근하기도 힘들었다. 



벨기에에서 유명하다는 홍합 요리를 먹었다. 맛있었다. ‘레미제라블’의 빅토르 위고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 감탄한 그랑플라스의 야경을 봤다. 멋있었다.


남자도 여자도 입과 눈이 즐거웠다. 그래도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입과 눈의 기쁨만으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다면, 지금 같은 문명은 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랑플라스를 벗어나자  호객 행위하는 가게들이 즐비했다. 호객행위를 하는 곳은 유럽에서 쉽게 만날 수 없었는데 다소 놀랍기도 했다. 값싼 관광지 특유의 분위기라는 여자의 지적은 정확했다. 


여독 탓인지 숙소에서는 금방 잠들었다.

전날 보아두었던 빨래방으로 갔다. 주인으로 추측되는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남자와 여자는 두 뭉치의 빨랫감들을 세탁기에 밀어 넣었다. 비용은 둘째 문제라고 치더라도 세탁기의 작동법을 알 수가 없었다. 기계 깨나 만지는 남자가 한참을 세탁기 앞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다가와 천천히 영어로 설명을 시작했다. 섬유 종류에 따라 세탁 시간을 다르게 하는 것이 낫다며, 빨랫감을 흘깃 보더니 타이머를 맞추었다. 


돌아가는 세탁기 앞에서 남자는 얼마인지를 물었다. 세탁과 건조가 다 끝나고 나서 지불하면 된다고 할머니는 대답했다. 할머니가 맞춰준 타이머의 시간은 가격표에서 가장 낮은 요금이었다. 남자와 여자는 별다른 걱정 없이 요깃거리를 사러 가기로 했다.      


 “저 할머니처럼 해주면 얼마나 좋아? 크게  힘든 일도 아니구먼.”

 “그러게 말이야. 여행자인 거 누가 봐도 알 텐데.”     


과일주스와 티라미수 그리고 몇 종류의 맥주. 요깃거리와 함께 깔끔해진 옷가지를 가지고 호텔로 돌아왔다. 아침 10시가 되기도 전에 남자는 8.5도짜리 맥주를 신나게 마셨다. 시답잖은 농담과 말장난에 여자는 남자가 아침부터 술 먹고 조증이라고 웃어댔다.


덕분에 기분은 한결 나아졌지만 브뤼셀에 대한 인상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연속됐던 그 일이 나중에 일어났으면 어땠을까? 브뤼셀은 좀 더 기쁘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두 명의 호텔 직원은 자신이 잘못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해를 끼친 것이 없으니 잘못한 일은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덕분에 누군가의 기분이 상하고 이 공간에 대한 인상이 나빠졌을 뿐.


그래도 내일은 다른 도시다.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 나쁜 것에 사로 잡혀 있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 곳 직원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이 커플의 체크아웃을 접수할 것이다. 어쨌든 이들에게 브뤼셀의 새로운 시작은 쉽지 않을 것 같다. 새로운 시작은 언제든지 가능하지만 언제나 힘이 드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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