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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원 Jan 31. 2017

문제는 권위주의야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스마트폰 제조사에서 출시한 최신형 스마트폰이 배터리가 터지는 사태로 출시 2달 만에 단종되었다."


"87년 직선제 이후 최초로 50%가 넘는 지지율로 당선된 대통령이 비선 실세에 의한 국정농단이라는 그야말로 어이없는 사태로 인해 자리에서 쫓겨나기 일보직전의 상황이다. "


이러한 일련의 사태들은 2016년 하반기의 한국에서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일어난 일들이다. 그야말로 초유의 사건이기에 모든 이들의 이목이 집중되었었고 현재도 집중되고 있다. 한국의 정치와 경제에 있어서 누가 보아도 최고의 자리에 있다고 할 수 있는 두 권력에게 일어난 이번 사태는 특정한 개인의 실수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한국 사회가 내포하고 있는 치명적인 문제가 드러난 사태 일지 모른다.


                문제는 바로 권위주의다. 


권력, 돈, 지위, 연령, 성별, 학력, 지식 등 꽤나 많은 것들이 사람 사이의 우열 관계를 형성한다. 조직에서는 상급자가, 세 들어 사는 집에는 집주인이 하물며 처음 만나는 사이에서도 연령을 기반으로 관계를 정리하는 방식은 한국인에게 일반적이다. 


물론 이러한 '권위'에 의해 상하가 구별되는 관계가 무조건 부정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2명 이상의 사람이 함께 무엇인가를 한다면 리더의 역할을 수행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이다. 아무런 구심점 없이 그저 만인이 모여 하나의 뜻을 품고 자율적으로 어떤 일을 진행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것이다. 소위 말하는 조직 생활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리더의 존재가치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리더 혹은 '권위'를 가진 누군가는 언제나 틀릴 수 있고 잘못될 수 있으며 실제로도 그러하다. 따라서 언제든 권위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리더에게 문제제기를 할 수 있어야 하고, 진정한 리더라면 그러한 문제제기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그러한 아래로부터의 간언이 잘 받아들여지는가? 하급자의 가슴 졸여 던진 한 마디에 상급자가 시큰둥하게 답하는 것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상황이다. 뭘 모른다는 지적은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하기에는 조심스러워도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하기에는 어렵지 않은 말이다. 한국 사회에서 하급자의 문제제기는 너무 힘이 든다. 괜히 긁어 부스럼이 될 것만 같고 자신의 문제제기가 잘못된 것이기라도 하면 자신의 출세는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운 것일 것만 같다. 중대한 일을 하고 있는 소수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 조직에서 일어나는 상황이다. 요행히 문제제기가 용이한 조직에 있거나 그러한 것이 가능한 상급자와 있다면 모를까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상황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해 수많은 새로운 의혹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관련자들은 처음에는 발뺌하다가 부정할 수 없는 증거에 말을 바꾸고 있다. 최순실이라는 비선 실세의 존재를 그들만 알고 있었을까? 아마 정확한 이름은 몰라도 누군가 의사결정을 좌지우지하며,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어떠한 경로를 통해야 한다는 것쯤은 정치인이나 관료, 기업인들의 상당수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 그중에는 이런 식으로 일을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을 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중에는 문제가 있다고 자신의 상급자에게 이야기를 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갤럭시 노트7이 출시되기 전 배터리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을 것이다. 폭발 위험성에 대한 경고는 최고 말단에서부터 고위 임원까지 세세하게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군가는 한바탕 싸우기도 했을 것 같고 터지면 책임질 거냐는 식의 이야기도 오갔을 것만 같다. 물론 그중에는 매우 희귀한 상황이 아니면 폭발까지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을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제기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제시되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리더에게 도전하는 것은 한국의 조직에서 긍정적으로 이해되기 어렵다. 그야말로 목숨 내놓고 싸워야 한다. 그렇게 이긴다한들 커다란 보상은 기대하기 어렵다. 현상유지가 가장 큰 보상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만일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상급자에게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직속 부하라면 싸움을 선택할 수 있겠는가?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도 자신 없다. 


문제는 이렇게 만연되어 있는 한국의 권위주의 문화가 소위 말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이다. 그동안 한국은 fast-follower 전략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기보다는 빠르게 모방하는 것을 통해 발전해왔다. 그런 발전전략 속에서 고민과 논쟁보다는 지시와 빠른 응답이 옳은 것으로 여겨지는 권위주의 문화는 긍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이 연결되고(사물인터넷) 지시와 실행의 구분이 사라져(인공지능), 질문과 답이 계속해서 변화하는 시대에서는 누군가에게 권위가 있다고 해도 예전과 같은 힘을 가지기가 어렵다. 새로운 것과 재미있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일상이 되어야 성장할 수 있는 상황에서 권위주의 문화는 치명적인 약점이다. 


어쩌면 그런 권위주의 문화 때문에 한국 사회의 상당수는 암묵적으로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말하는 대로만 하면 다 잘 될 그런 구세주 같은 존재의 등장. 하지만 그런 신과 같은 인간은 없다.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권위'를 '권력'과 동의어로 받아들이는 권위주의 문화를 변화시킬 수 있는 방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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