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만명에게 나누어 주면 20만원 조금 넘게 나누어 줄 수 있는 돈입니다. 이 돈이 있으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당신에게 이 돈이 생긴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요? 물론 특정한 개인이 자신의 목적으로만 쓸 수 있는 돈은 아니라는 전제에서 묻는 질문입니다. 구체적인 정책들을 열거할 수는 없더라도 좋은 일에 쓰고 싶다는 생각,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 등이 지배적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돈이 좀 어이없이 쓰이고 있다면 어떨까요? 슬슬 돈의 액수와 이 '어이없다'는 문장에 많이들 눈치채셨을 것입니다. 11조 4천억 원이라는 돈은 다소 어이없이 쓰인 예산을 모아놓은 액수입니다. 그렇다고 어이없는 예산 모두를 제시한 것도 아니고 특정한 해에 쓰인 예산만을 지적한 것도 아닙니다. 누구나 들어보았음직한 굵직한 것들 몇 가지만을 꼽아본 것이 이 정도 금액입니다.
녹조라떼라는 말도 안되는 신조어를 탄생시킨 4대강 사업에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갔음은 누구나 알 것입니다. 사업 자체에 쓰인 돈이야 심하게 말하면 이미 버린 셈이니 그렇다치더라도 앞으로도 계속 발생하는 비용이 있습니다. 바로 4대강 사업을 위해 발행한 채권에 대한 비용입니다. 수자원공사는 4대강 사업을 하기 위해 8조원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했습니다. 발행한 채권을 구매한 사람에게 수자원공사는 정기적으로 이자를 지급해야 합니다. 이 이자 비용을 중앙정부의 예산으로 지원하고 있는데 2036년까지 총 2조 9천억 원을 지원할 예정입니다. (필자가 임의적으로 계산한 금액이 아니라 정부가 발표한 결산 자료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한국 군대 시설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은 오래되었다는 것과 낡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도 많은 청춘들이 자신의 아버지가 생활했음직한 공간에서 군 생활의 상당 기간을 보냈습니다. 수용소 같은 낡은 나무침상을 최신의 침대식으로 바꾸겠다는 국방부의 야심찬 계획은 2004년부터 2012년까지 7조 1천억 원을 투입해 진행되었습니다. 그럼 결과는 어땠을까요? 아직도 진행중입니다. 8년이 넘는 기간과 7조가 넘는 돈에도 한국 군의 병영생활관은 새끈하게 변모하지 못했습니다. 사업이 완료되지 않아 국방부는 더 많은 예산을 요구했고, 덕분에 기획재정부는 2015년부터 16년까지 1년간 실사 작업까지 했습니다. 뭐 그래도 완료가 안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고 이후에도 예산은 계속해서 더 투입되고 있습니다.(이것 역시 필자가 별도로 취재한 것이 아니라 기획재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문서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져버린 계기는 JTBC의 태블릿 PC 보도 였지만, 그 전부터 문제가 되었던 건 미르재단, K-스포츠재단 건이었습니다. 정부 예산을 이상하게 쓰고 있다는 지적에서 시작되어, 결국 '최순실 예산'이라는 단어까지 만들어내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최순실 예산이 2015년부터 17년까지 약 1조 4천억 원에 달한다고 합니다(2016, 정창수·이승주·이상민·이왕재,『최순실과 예산도둑들』,p.29). 그 중에는 의혹이 억울한 예산도 있겠지만 정말 의혹투성이인데 지적받지 않은 예산도 있을 것입니다. 어찌됐든 조금이라도 관련되었음에도 현재 드러나지 않은 사람들과 사업들은 지금과 같은 시국에서는 숨죽이고 있을 테지만 말이죠.
11조 4천억 원의 정체가 이것입니다. 정말 이 금액뿐일까요? 아닙니다.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11조 4천억 원 모두가 지독스레 문제라고 이야기하려는 것 또한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정부 예산이라는 어마무시한 액수의 돈이 이렇게 어이없이 쓰이는 것을 지켜만 봐야 하는가입니다. 정부가 예산을 편성해 국회에 제출하면 국회에서 심의하는 기간은 대략 40일 남짓. 현 국회법 상 12월 1일 기준으로 예산안이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면 정부에서 제출한 예산안이 자동으로 통과됩니다. 즉 정부의 예산 편성을 국회에서 견제하려면 40일 남짓의 시간을 반드시 지켜내야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정부 각 부처에서 제출하는 예산서는 몇 천 페이지가 기본입니다. 아마 정부에서 국회에 제출하는 예산서의 총합은 어림잡아도 십만 페이지는 될 것입니다. 그 또한 매우 자세하게 쓰여있지도 않습니다. 무슨 사업을 하는 것인지는 쓰여 있지만 구구절절 멋진 말들 뿐입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나쁜 일을 하는데 돈을 쓸테니 승인해달라는 것은 당연히 말이 안되니까 말이죠. 멋진 미사여구로 꾸며진 예산서가 문제가 아니라 그 사업의 결과물이 문제인 것입니다. 올해 예산은 400조가 넘는다는데, 예산서의 사업들만 보면 한국은 '헬조선'이 될 수가 없는데, 그런데 왜? 왜 우리는 지금 이런 것일까요?
문제 해결을 위한 작은 시작에 불과하지만 잘못된 예산 사용을 사전에 방지하고 감시하기 위한 토론회를 개최합니다. 앞서 언급한 책의 저자이면서 20년 가까운 세월을 예산감시운동에 매진한 정창수 소장이 발제하고 학계와 정부 관계자가 함께 고민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