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멈추었을 때, 나 홀로 움직인다는 것.

#1-1 횡단보도에 대한 단상

by 술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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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곳에 서면 숨이 턱 막힐 때가 있다. 빨가면 멈추고, 초록이면 움직여야 한다. 규칙적인 패턴으로 흰 색 줄무늬가 쳐져있는 직사각형 공간 안에서는 꼭 그래야만 한다. 유일한 반항은, 가만히 있는 것뿐이다. 빨간불이 켜졌는데도, 돈 키호테마냥 그 공간 사이를 내지른다면 불상사를 겪을 수도 있다. 보통의 시민교육을 받은 이들이라면, 약간의 죄책감을 느낄 테다. 이건 가장 다행인 경우다. 일이 조금이라도 틀어진다면, 경제적 손실과 더불어 범법자의 낙인이 찍힐 수도 있다. 심하게는 생명의 위협도 감수해야만 한다.


이 공간은 철저히 통제받는 공간이다. 개성이니, 자유의지니 하는 달달한 용어는 어울리지 않는 그런 곳이다. 철저히 균질화된 곳이다. 모두가 같은 행동 양식을 따른다. 특히나 사람이 붐비는 곳이라면 이는 더욱 장관을 만들어낸다.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멈추었다, 동시에 움직인다. 마치 전쟁에 나온 군인들 같다. 청기가 올라가면 일제히 돌진하고 백기가 올라가면 일제히 후퇴하는, 그들 말이다. 우리는 그 어떤 군인들보다 훈련이 잘 되어 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이곳에서 멈추었다 움직이길 반복하지 않던가.


푸코의 말마따나 신체의 지배는 곧 정신의 지배로 이어진다. 일상적으로 반복된 이러한 신체의 지배는 우리의 판단력을 앗아간다. 도시 권력이 필요한, ‘만들어진 시민’의 탄생이다. 이제 우리는 의례 그렇게 행동한다. 골치 아프게 판단하지 않는다. 다들 그렇게 하니까, 나도 그냥 그렇게 한다. 이때 무서운 문장이 새겨진다. ‘좋은 게 좋은 거야’ 좋은 것이 무언지에 대한 고민은 없다. 다들 그러하니까, 그것이 좋은 거다. 강남역 지오다노 앞이나 구월동 신세계 앞 사거리에서 펼쳐지는 장관을 보노라면, 가히 스펙터클하기까지 하다.


간혹 이곳에 서면 충동이 일 때가 있다. 모두가 멈춰있을 때, 나 홀로 움직여 저 반대편으로 넘어가보고 싶다. 모두가 움직일 때, 나 홀로 우두커니 서 있어보고 싶다. 나만이 선명하고, 주변은 빠르게 흐르는 영화 속 장면을 상상하기도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시민’의 윤리를 져버리는 죄책감을 이겨내야 한다. 심지어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하기도 할 테다. 그럼에도 굳이 모난 돌이 되고자 하는 이 심정은 무엇일까? ‘만들어진 시민’이 되길 거부한다는 일종의 ‘깨시민인 척’일까? 아니면 주목받고 싶어 하는 ‘관종’인 걸까? 어쨌거나, 그렇게나마 나는 주인공이 되고 싶은지도 모른다. 톡하고 튀어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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