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횡단보도에 대한 상상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을 바꿀 필요가 있겠어. 요즘 세상에 누가 외나무다리를 건너. 요즘 트렌드는 횡단보도야, 횡단보도. 그곳을 가려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데, 아니면 삥 둘러 가야하는데, 하필 너가 거기 있을 게 뭐람. 눈이라도 마주치지 않았다면, 내 하찮은 시간을 투자해서 널 피했을 거야. 제기랄, 지금 와서 그러면 마치 내가 널 피한 것 같잖아. 이판, 사판, 공사판이다 이거야.
수많은 횡단보도 중에 하필 이곳에서 보다니. 바로 100미터만 더 가도 횡단보도가 또 하나 있는데도, 여기서 이렇게 마주보게 되다니. 그것도 바로 이 시간에.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 중에 네가 이렇게 한 눈에 확 들어오다니. 못 보고 지나칠 수도 있었는데 말이지. 이런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란 거겠지? 아니, 운명이라고 해야 하나.
뭐라고 인사를 건네야지? 수십 가지 인사말들이 떠오르네. 안녕? 곤니찌와? 닌 하오? 봉주흐? 구텐탁? 니기미. 니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까먹었네. 그건 그렇고 여자였나? 남자였나? 아.. 너 누구였지? 분명 이렇게 날 고통스럽게 한 놈이 있었는데.. 그게 너 맞지? 너 맞는 거지? 너 아니구 넌가? 그래 너다! 너가 아니라 너였어! 아닌가, 저 뒤에 서 있는 놈이었어! 그래 너야 너! 아니야, 아니야. 처음부터 너였어! 그래! 니가 내 운명이다!
초록 신호탄이 터지면, 난 너에게 한 걸음에 달려갈 거야. 이 신호가 영원했음 좋겠지만, 미안해. 난 이곳을 빨갛게 물들일 거야. 그럼 아무도 움직이지 못하겠지. 빨가면 움직이면 안 되는 거잖아, 그잖아. 꼼짝 마. 이 운명처럼 만난, 원수야.
그런데, 나는 어디로 가던 참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