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열에 앉는 남자

#7-2 일상에 대한 상상

by 술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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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열 4번이요.”


영화관 알바생이 의아하게 쳐다봤다. 텅텅 비어 있는 영화관에서 굳이 A열을 택하는 사람이 흔하진 않을 테니까. A열이 맨 앞좌석인데 괜찮냐고 친절히 물어봐주기까지 했다. 젠틀하게 웃어보였다. 쿨함이 생명이다. 커다란 스크린에서 뿜어져 나오는 찬란한 빛의 향연을 제일 먼저 맛보고 싶다랄까? A열은 그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최초의 번쩍임을 향한 나만의 제단이다.


영화관 A열에 앉았다. 다리 한 쪽을 꽈주고, 팔짱을 낀 채 고개는 약간 기울여서. 일제 강점기 시대 지식인 느낌 나는 동그란 검은 뿔테 안경을 검지손가락으로 종종 치켜 올리면 더욱 안성맞춤이다. 주변에 팝콘이나 콜라 따위의 것은 없어야 한다. 영화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전날 잠도 푹 자야한다. 복장은 격식은 갖추되 불편해선 안 된다. 이 정도면 영화를 감상할 준비가 어느 정도 됐다고 할 수 있겠다. 아, 한 가지 가장 중요한 게 빠졌다. 영화관 안에 나를 제외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 영화는 집단 경험이지 않겠는가. 나 혼자 볼 거라면, 굳이 이곳을 찾을 이유가 없지.


영화 시작까지 10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한 좌석도 팔리지 않았다니. 철 지난 러시아 형식주의 영화를 택하는 게 아니었다. 영화관을 전세 낸 마냥 영화를 혼자 보게 생겼다. 그건 좀 곤란하다. 혼자 보는 것도 영화라면 뤼미에르 형제가 아니라, 에디슨이 영화의 아버지가 됐을 거다. 영화를 보는 건 집에서 혼자 할 수 있는 거지만, 영화를 감상하는 건 영화관에서 여럿이 해야만 한다는 게 나름의 철학이자 뤼미에르 형제에게 바치는 일종의 리스펙이다.


체념했다. 이번엔 어쩔 수 없이 혼자 봐야겠거니. 갑자기 졸음이 몰려왔다. 안 돼. 어제 충분히 잠을 잤는데, 왜 이러지. 영화보다 졸게 생겼다. 광고를 하는 동안 눈 좀 감고 있어야지 싶어,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오프닝 시퀀스를 알리는 장엄한 사운드에 몸을 흠칫했다. 입맛을 다시며 팔짱을 풀고 의자에 제대로 앉았다. 내 오른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바로 내 옆자리에 한 여자가 꼿꼿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그것도 바로 내 옆자리에. 주변을 돌아봤다. 여전히 텅텅 비어있다. 왜 굳이 내 옆자리에 앉은 걸까?

좋은 향이 났다. 한바탕 시원하게 쏟아지는 소나기가 생긋한 풀잎을 적실 때, 그럴 때 은은하게 울려 퍼질 듯한 향이었다. 나도 모르게 숨을 깊게 들이 쉬었다. 하얀색 단화. 발목 위까지 덮는 노란 양말. 무릎까지 내려온 체크무늬 스커트. 그리고 자주색 니트. 흘긴 눈으로 볼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고개를 좀 더 돌려 얼굴을 보고 싶었다. 예쁠 거 같았다. 아니, 예쁘길 원했다.


에이젠슈타인의 <전함 포테킨>을 연상케 하는 총격전이 나왔다. 그에 대한 오마주였으리라. 씬과 씬이 끊임없이 충돌했다. 충돌은 쇼트들이 하는데, 왜 내 심장은 이토록 뛰는지. 오른쪽 어깨에 무게감이 느껴졌다. 향긋한 향이 확 몰려왔다. 형형색색 가득한 꽃밭에 뒹굴면 이런 냄새가 날까? 아, 그것보다 이 상황이 대체 무슨 상황인지 먼저 파악해야 하는데...


“무거워요?”


담담했다. 그리고 나긋했다. 툭 내뱉은 네 마디가 온 살갗에 아로새겨졌다. 영화관 안에 진한 향이 가득 찼다. 뭐라고 답해야할지. 온갖 단어들이 떠올랐다.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몇 초간 아무 말이 없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도 고개를 돌렸다. 나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이런 게 아우라인가 보다. 영화관이 원래 이렇게 밝았었나? 그녀만을 위한 핀조명이 있어 그쪽만 밝히는 듯했다. 침이 꼴깍. 왜 갑자기 침이 고였는지. 입술은 왜 바짝바짝 탔는지.


별안간, 삐-------------------------------------------------------------------.


이명인지, 내 심장이 멈춘 건지. 온 감각이 입술로 쏠렸다. 누군가 내 팔 하나를 잘라가도 모르겠다. 눈앞은 계속 번쩍였다. 스크린에서 뿜어져 나오는 희뿌연 빛들인지, 정신 나간 뇌가 시신경을 오작동 시키고 있는 건지.

물컹한 게 내 입속으로 들어왔다. 마중을 나가야 하는 걸까? 그 물컹한 것이 입안을 헤집고 다녔다. 쇼팽의 왈츠 7번곡이 들렸다. 빨라졌다 느려졌다, 강렬했다가 부드러웠다가. 반복된 황홀감이 고통스러웠다. 역시 이건 쿨레쇼프라기보다 에이젠슈타인이었다. A와 B가 합쳐지는 것이 아니라, 충돌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강렬하게. 그것은 AB가 아니라 또 다른 C를 창조해내는 것이었다.

*

오프닝 시퀀스를 알리는 장엄한 사운드에 몸을 흠칫했다. 입맛을 다시며 팔짱을 풀고 의자에 제대로 앉았다. 내 오른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바로 내 옆자리에 한 여자가 꼿꼿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그것도 바로 내 옆자리에. 주변을 돌아봤다. 여전히 텅텅 비어있다. 왜 굳이 내 옆자리에 앉은,,, 어라? 뭐지?

너무 이상한 기분에 옆자리에 앉은 그녀와 한동안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금세 눈길을 피했을 텐데, 어쩐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내 몸이 왜 자꾸 그녀에게로 쏠리는 거지?

별안간, 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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