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거짓말에 대한 단상
세상에 거짓말은 없다. 모든 게 거짓말이기 때문에, 거짓말은 없다. 내가 있는 건, 나와 구별되는 너가 있어서다. 이 세상에 나밖에 없다면, 나를 규정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어둠이 있기에 빛이 있고, 악이 있기에 선이 있는 것처럼. 거짓말이란 거짓인 말인데, 세상의 말은 모두 거짓이 될 수밖에 없다. 국어사전은 거짓을, 사실과 어긋난 것이라고 정의한다.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 전달되어지는 모든 건 사실과 어긋난다. 모든 게 사실과 어긋나는데, 그것을 굳이 거짓말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필요가 있을까?
이는 모두 ‘말’, 그러니까 ‘언어’ 때문이다. 사실이란 건, 나에게서 너에게로 전달될 때 의미가 있다. 라캉의 개념을 쓰자면, 우리는 유아기의 주관적 상상계를 벗어나 상징계로 들어간 순간 끊임없이 타자와 교류한다. 그 전달의 매체는 모두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더 이상 언어는 투명하지 않다. 주체와 대상을 굴절시키고 왜곡시킨다. 내가 아무리 사실을 말해도 그것을 전달하는 언어가 굴절되고 왜곡되니, 이것은 곧 본래 사실과 어긋나게 된다. 사실이 사실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이 비극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을 떠나면서 시작된다. 성경에 따르면 이 세상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된다. 이때 말씀, 즉 언어는 창조 그 자체이자 사실을 뛰어넘는 진리다. 하느님은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하시며 인간을 만드신다. 그렇게 인간은 창조와 진리의 언어를 지니신 하느님을 닮게 창조됐다. 이로써 인간은 언어를 갖게 될 수 있었고, 그 언어는 신의 정신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벤야민은 이 언어를 ‘아담의 언어’라고 불렀다. 이는 말과 동시에 사물의 본질을 지각할 수 있는 언어다. 전혀 어긋남이 없는 언어, 그게 바로 아담의 언어다. 진중권 교수는 이를 ‘이름하는 언어’라 칭한다. ‘말을 한다’라기 보다 ‘그 말이 된다’는 것이다. 즉, 어떤 말을 설명하지 않아도 그 말 자체로 모든 본질이 받아들여지는 일대일 대응의 언어인 것이다. 이 언어는 에덴을 벗어나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엔 바벨탑이 무너지며 산산조각난다.
소쉬르가 지적했듯, 오늘날 언어는 기표와 기의 사이의 자의성을 갖고 있다. 이 자의성이 사실을 왜곡하고 굴절시킨다. 같은 단어를 100명에게 말하면, 100명 모두 다른 기의(의미)를 떠올린다는 이야기다. 본래 하나의 언어가 전하려는 사실이 어긋나며 여러 개로 퍼진다는 것이다. 그래도 소쉬르는 이것이 일대일로 연결되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른바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소쉬르가 말한 언어의 자의성만 인정하고, 일대일 대응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모든 언어는 사실과 어긋날 수밖에 없다.
이곳은 불완전한 언어로 너와 나의 사실이 어긋날 수밖에 없는 에덴동산 바깥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어사전이 정의내린 개념의 거짓‘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거짓은, 그리고 부정은 분명 존재한다. 우리는 보통 거짓‘말’에 분노한다. 자신을 기만하고 속였다는 기분 때문일 테다. 이것은 본질과 상관없는 감정적인 분노일 뿐이다. 이 에덴동산 바깥에서, 언어는 본래 사실과 어긋나는 거짓말임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보다 분노해야할 건,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그들의 거짓과 부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