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거짓말에 대한 상상(일부분만 발췌합니다.)
(일부분만 발췌합니다.)
바람이 포근했다. 잔디를 살랑이던 것이 덕혜의 하얀 살갗을 간지럽혔다. 이내 곧 덕혜와 이야기하고 있던 살구나무 잎들도 한바탕 춤사위를 펼쳤다. 살구나무는 덕수궁에서 유일한 이층 건물인 석어당을 압도할 만큼 커다랬다. 덕혜는 부르르 떨며 춤을 추는 살구나무를 보고는, ‘헤’ 하며 소리 내어 웃었다. 오후의 따사로운 햇살이 살구나무 잎 사이로 들어왔다. 덕혜는 오른쪽 눈을 찡긋했다. 그래도 따가웠는지 왼쪽 손을 올려 햇살을 가렸다.
“이제 그만 흔들고 다시 나랑 얘기해!”
덕혜가 살구나무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갔다. 그 작은 손으로 살구나무 옆구리를 쓰다듬었다. 주위에 있던 궁녀들이 웅성웅성됐다. 유모가 그들을 째려봤다. 유모는 깊은 한숨을 머금고 덕혜를 향해 갔다.
언제부턴가 덕혜는 사람이 아닌 것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동물, 식물, 곤충 할 것 없이 자연 모두가 덕혜의 친구였다. 그러자 궐 안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고종의 하나 뿐인 딸, 복녕당 아가씨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유모가 살구나무 곁으로 발을 내딛었다. 살구나무의 우거진 녹음이 그녀를 빨아들였다. 유모는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감았다. 살구나무 품속은 망국의 아픔도 달래줄 만큼 평화로웠다. 두 눈을 뜨고 살구나무를 쳐다보니 이따금씩 뽀얀 살구 열매들이 찬란하게 맺혀있었다. 하늘이 살구나무를 타고 땅에 닿았다. 그녀는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도 잊은 채 그 황홀함에 빠져들었다. 그때 아스라이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유모는 그제야 덕혜를 찾았다. 방금 전까지 살구나무를 껴안고 있던 꼬마 아가씨가 보이지 않았다.
덕혜는 중화전 쪽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덕혜가 달려가던 곳을 보던 유모는 자세를 바로하고 고개를 숙였다. 총총총 뛰어오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고종은 덕혜를 번쩍 들어 안았다. 항상 그늘진 고종의 용안이 이때만큼은 환히 빛났다. 고종에게 덕혜는 그야말로 세상 전부였다. 그녀는 일제의 강압으로 치욕스런 양위를 하고 무료한 말년을 보내던 고종에게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었다. 영친왕도 일본으로 끌려가고 엄 귀비도 세상을 떠났으니 덕혜의 존재는 유일한 즐거움이자 행복이었다. 국왕의 근엄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