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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인 Jan 27. 2023

변수와 상수의 위안

베아트리체 알레마냐,  『사라지는 것들』


3년 만에 방문한 제주였다. 엄마 품에 안겨 비행기를 탔던 세 살의 기억을 팬데믹을 지나오며 까맣게 잊어버린 여섯 살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떠난 작년 5월의 여행. 평소의 일상이 그렇듯 제주에서의 하루하루 또한 아이의 의사와 결정 위주로 돌아갔다. 나의 뜻과는 상관없이 흘러가는 일정과 느닷없이 나타나는 변수들에 그리 크게 마음을 두지 않으려 했다. 아이 얼굴에 사르르 번지는 충만한 기쁨은 곧 아이를 지켜보는 나의 해사한 행복이었기에.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오롯이 집중하자며 나 자신에게 수없이 되뇐 여행. 철저한 계획형 인간이었던 내가, 엑셀로 시간 단위의 계획을 촘촘히 짜던 내가, 계획대로 되지 않을까 미리 불안에 잠식되던 내가 이렇게 변했구나. 나 자신에 대한 생경함에 자주 피식하곤 했다.


불확실과 무계획 위에 흔들리듯 쌓아가는 여행이었지만, 그럼에도 매일 하나씩 빼놓지 않고 챙겼던 ‘계획’이 있었다. 가족의 배려로 가능했던 나의 유일한 계획은 제주 내음이 물씬 풍기는 동네책방에 방문하는 것. 그간 SNS를 통해서만 살펴보고 마음속으로만 그려보았던 동네책방에 들어서자, 떨리는 안정감이 내 몸에 잔뜩 휘감겨왔다.


책방만의 특색을 담아낸 여러 큐레이션을 꼼꼼히 살펴보며 나를 위한 기쁨을 차곡차곡 저장해가고 있던 그때. 민들레 홀씨를 후후 불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우리의 일상에서 지나가고 변하고 사라지는 갖가지 것들을 반투명한 종이들로 표현한 한 권의 그림책. 한 장 한 장 조심스레 넘기는 순간에 나는 그대로 붙들려버렸다. 아이에게 말하고 싶은, 나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그림책을 머나먼 제주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잊지 않고 잃지 않을 마음을 상기해줄 아름다운 그림책은 그렇게 내 가방 속으로, 내 삶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베아트리체 알레마냐, 『사라지는 것들』, 김윤진 옮김, 비룡소


잠은 스르르 왔다가도 사라진다. 무릎 위의 성가신 상처는 적당한 시간이 흐르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된다. 공간을 채우는 아름다운 음악은 이내 공간 속으로 흩어져버리고, 아이가 힘껏 불어냈던 비눗방울들도 이내 소리 없이 터지며 동그란 얼굴을 감춰버린다. 두 손과 두 볼을 가득 적시는 눈물도, 한 모금 마시는 것도 조심스러운 커피의 열기도, 머리 위 햇살을 가리는 먹구름도, 쉬이 잠들지 못하도록 몸과 마음을 억누르는 상념들도, 가지마다 가득 피어난 꽃잎과 열매들도, 한껏 앓아가며 입 안에 자라났던 어린 젖니들도 모두 시간이 지나면 없던 듯 사라져 버린다.


작가는 책의 말미에서 숱한 것들이 지나가고 변하고 사라지는 삶 속에서도 ‘영원히’ 변하지 않고 사라지지 않을 마음을 그려냈다. 아이를 다정히 바라보며 따스히 안아주는 엄마의 손길과 눈길. 엄마의 넓고 깊은 품 안에서 흔들리는 하루의 위로를 얻어가는 아이의 미소. 엄마는 변하지 않을 마음을 언제든 아이에게 전해주고 싶고, 아이는 변하지 않을 마음을 언제든 엄마로부터 전해받고 싶다.


여행을 떠나기 한두 달 전부터 나의 여섯 살 아이는 엄마 아빠의 죽음 이후를 두려워하곤 했다. 영원히 헤어지는 ‘이별’에 대해 생각만 해도 금세 얼굴을 찌푸리며 눈물을 쏟아내는 아이. 그런 아이에게 죽음을 부인하는 거짓말을 전할 수 없는 세상의 이치는 얼마나 벅차고 무거울지. 그런 아이에게 건네는 나의 진심어린 고백은 언제나 똑같다. 사라진다 해도 사라지지 않을 기억을 살아가는 내내 너와 최선을 다해 만들어가겠다고. 사라져도 살아갈 수 있게 버팀목이 되어 줄 마음을 살아가는 내내 네게 힘껏 내어주겠다고.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은 네 삶에 내가 있든 없든 사라지지 않을 상수(常數)일 것이라고. 그것이 너와 나를 가로지르는 생사의 한계를 견디게 할 불변(不變)의 위안이 되길 바란다고.


한편, 시간의 앞뒤를 흐릿하게 가리는 반투명한 종이들을 번갈아 넘겨가며 나 자신에게 여러 번 되물었다. 숱한 만남과 이별이 이어지는 삶을 향한 질문을. 예기치 않게 등장하고 사라지는 것들의 흉터나 흔적에 붙들리고 매인 마음이 나의 하루를 더 외롭고 괴롭게 하지는 않았는지. 사라짐으로 인해 슬픔을 느끼는 순간이 있는 것처럼 사라짐으로 인해 기쁨을 느끼는 순간도 있음을 충분히 지각하며 살고 있는지. 시간이 흐를수록 흐려지고 변하며 사라지는 것에 미련을 두고서 집착하는 마음이 또 다른 사라짐을 인지하지 못하게 막는 내벽이 되진 않았는지.


여행하는 내내, 아이의 얼굴에 번졌던 충만한 기쁨은 생각보다 빨리 아이에게서 사라져 버리곤 했다. 생각보다 더워서, 생각보다 피곤해서, 생각보다 귀찮아서 오래가지 못 한 즐거움은 이내 짜증의 감정으로 뒤바뀌었다. 그 짜증을 있는 그대로 다 받아내야 하는 두 명의 시중들 또한 급격하게, 자주 피로함을 느꼈다.


그렇기에 심신의 지친 감정이 이 여행의 전부가 아님을 여행 내내 잊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짧은 찰나를 가득 채웠던 기쁨과 행복이 흐려지고 변하고 사라져 가더라도, 그것들이 분명 우리에게 존재했다는 사실까지 부정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망각하고 왜곡하지 않으려는 노력에 기대다 보면, 기대하지 않았던 생소한 기쁨을 생각지도 못한 시공간에서 마주칠 수 있다는 믿음을 잃고 싶지 않았으니까. 곧 사라져 버리거나 언제든 새롭게 나타날 예상 밖의 변수(變數)들은 우리의 ‘인생’이란 여행을 가로지르는 피곤을 견디게 할 가변(可變)의 위안일 테니까.



각자의 지난한 삶을 버티며 살아갈 수 있음은 삶의 안팎에 내재하고 외재하는 수많은 변수와 상수 덕분이 아닐까. 언젠가는 변하고 사라질 것이기에 위로가 되는 것들. 언제까지라도 변하거나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에 위로가 되는 것들. 이것들이 사라지길 바라고 사라지지 않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매일같이 열고 닫는 우리의 하루를 가능케 하는 것은 아닐는지.


결국 변수와 상수가 뒤섞인 삶을 살아가는 나의 최선은 지금 이 순간, 주어진 현재에 집중하는 것일테다. 변하지 않는 것들을 잊지 않고 잃지 않으면서. 흐려지고 변하고 사라지는 것들에 적당히 기대고 적당히 기대하면서. 수많은 변수와 상수 사이에서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주체적으로 고민하고 결정하면서. 지금 당장 사랑할 수 있는 것을 적극적으로 품고 어루만지면서. 사라져선 안 되는 무언가를 기꺼이 지켜내면서. 사라져 가는 무언가를 기꺼이 보내주면서.



사라짐으로 나를 잠시 멈춰 서게 하는 것들이 있다. 사라지지 않음으로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하는 것들이 있다.    

사라짐으로 나를 다시 웃게 하는 것들이 있다. 사라지지 않음으로 나를 여전히 웃게 하는 것들이 있다.

사라짐으로 나를 나답게 만들 것들이 있다. 사라지지 않음으로 나를 나답게 만들 것들이 있다.

사라짐으로 나를 계속 살아가게 하는 것들이 있다. 사라지지 않음으로 나를 계속 살아가게 하는 것들이 있다.


제주의 고요한 동네책방에서 끌어안고 돌아온 것은, 하루를 채우고 일상을 넘나드는 변수와 상수의 고요한 위안이었다. 나를 지키고, 우리의 관계를 지켜줄 마음 한 권이었다.



* 베아트리체 알레마냐, 『사라지는 것들』, 김윤진 옮김, 비룡소,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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