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베네치아
그것은 어느 여름 아침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엄마 아빠의 인생은 자기들이 세상에 존재한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믿는 아이들이 아직 알지 못하는, 그런 오래전 어느 여름날의 일이었다.
어스름 저녁에 뮌헨을 떠났던 열차는 까만 밤을 헤치며 질주하였다. 어느 중간역에서 기차가 둘로 나뉘었다. 잠결에 옮겨 탄 열차는 알프스를 쉬지 않고 종주하더니, 아침 녘이 되어 베네치아의 산타루치아 중앙역에 다다랐다.
결혼을 하고 나서야 '속았다'는 여러 사실들을 깨닫게 된 그녀의 마음이 행여 더 차가워질까 봐, 초보 신랑은 그녀의 손을 이끌어 업비트 레게 사운드의 배낭여행 설렘 속으로 뛰어들었지만 - 야간열차에서 지새운 지난밤은 우리에게 너무도 차가웠다.
초췌한 몰골로 조용히 역을 빠져나왔다. 알프스를 흐르던 밤은 길고도 검더니, 리알토 다리 아래로 햇살은 물이 되어 흩어지고, 은빛 물고기의 비늘들이 끝 모르게 반짝거렸다. 좁은 골목을 따라, 커피 향과 바닷바람이 함께 흘렀다.
카날 그란데의 물이 산마르코 광장 끝에 와닿았을 때, 구름이 수면에 비치었고, 조금 전 탄식의 다리 밑을 빠져나온 푸른 곤돌라의 그림자가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 방향으로 천천히 번져갔다.
그곳은, 너무 밝고, 너무 완벽해서 - "낙원의 증거야!"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말끝이 햇살 속에서 희미하게 사라졌다.
두칼레 궁전을 마주 보며 노천카페에 자리 잡고 앉았을 때, 작고 하얀 잔 속 인생 첫 에스프레소는 특별히 검고 진했다.
“더운 날엔 베네치아 지도랑 에스프레소, 둘 다 무겁죠.”
서빙하던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짧게 웃었다.
남몰래 건배를 하고, 천천히 첫 모금을 마셨다. "컥." 달콤함은 어디 있는 것인지, 쓴맛과 열기가 입속에 눌러앉았다.
산마르코 대성당 앞에선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서 본 것들과 똑같이 생긴 비둘기들이 홰를 칠 생각 따윈 없는 듯, 결항을 한 채 어슬렁거리기만 하였다.
푸른 물도, 푸른 곤돌라도, 잿빛 비둘기도, 검은 에스프레소도, 그녀의 빨간 폴로 티셔츠도... 그 모든 광경은, 심지어 좁고 낡은 창밖으로 햇살에 반짝이는 빨래마저도, 깊은 밤을 날아온 우리에게는 세상 처음의 따뜻함이었다. 초여름의 베네치아는 점점 뜨거워져 갔고, 그 열기 속에서 지난밤의 추위가 녹았다. 듣고 팠던 업비트 레게 사운드도 멀리서 들려왔다.
그리고, 그날 아침의 광경은 베네치아가 마침내 물속에 완전히 잠겼다는 세기말의 소식이 들려올 때까지는 변함없이 반짝일 줄 믿었다.
그것은 어느 가을 오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이들이 세상에 존재한 이후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아기가 온전한 아이로 커가는 과정은 표현력과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었고, 그녀와 나 둘만의 그 여름날 추억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 절취선을 따라 그만 뜯겨나갔다.
돈 아껴보자고 야간열차에 몸을 실어 차가운 밤을 헤맬 필요도 없어졌다. 베네치아 마르코폴로 공항 활주로에 라이언에어 항공기가 사뿐히 착륙하였다. 기내에선 정시 도착을 자축하는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렌터카를 몰아 마치 처음인 듯 리버티 다리를 건넜다.
"엄마, 왜 집들이 물속에 잠겨있어?"
눈이 동그래진 큰 아이의 일성에 작은 아이가 즉각적으로 반응을 하였다.
"헐!"
그날 내가 섰던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과 푸른 곤돌라의 배경으로 햇빛이 아이들의 어깨를 스치고, 그날 그녀가 앉았던 카페 벽으로 금빛 물결이 반사되었다. 그 여름의 기억이 어렴풋한 만큼 아이들의 웃음은 선명하였다.
에스프레소 두 잔을 내려놓았던 그날 그 노천카페의 테이블 위엔, 그 가을엔 먹을 것도 놓였다.
'낙원의 증거일지도 몰라.'
커피 향과 빵 냄새와 바다내음의 칵테일이 너무나 절묘해서, 햇빛 드는 카페테라스 한쪽 자리가 너무 완벽해서 — 그 가을날은 숨만 쉬어도 아찔할 정도였다.
유리잔 속에서 빛이 서서히 사라지고 붉은 노을이 구름 자욱한 진홍빛으로 타오르더니, 산마르코 광장에 어둠이 짙게 들었다. 홰를 칠 줄도 모르고, 날지 않고 결항하던 오후 광장의 비둘기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낙원의 증거인양 수은등 불빛 아래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우리도 손에 손을 잡고, 그 무리를 따라 낙원의 길을 계속 걸었다.
이것은 또 다른 어느 가을, 바람이 불어 낙엽이 평생 단 한 번 비상(飛上)의 기회를 헤매 날아오르는 때였다.
"그때 결혼을 하지 말고 유학을 떠났어야 했는데..."
그녀가 내 가슴살 한 근을 베어내는 섬뜩한 소리를 하길래, 업비트 레게 사운드의 환청을 찾아 들으며, 플라스틱 박스 속에 처박아둔 오래전 배낭여행 무광 인화 사진을 꺼내보았다. 색이 다 바랬다.
세월 탓인지,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게 되는 일도 생기고, 인생에는 그냥 계속 느끼는 방법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감정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그 가을의 베네치아 풍경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 절취선을 따라 뜯겨나갔었나 보다.
언젠가는, 오래전 여름 그날의 배낭여행 때처럼, 오롯이 나와 그녀 둘만이 산마르코 광장의 카페테라스에 앉아 있는 그 시간이 올 것이라 생각하였다. 느닷없이 벌어진, 수습 못 할 상황이었다.
햇살 아래 둘이서,
붉게 물든 구름이 부드럽게 죽어가는 늦은 오후에 피어날 때,
카페테라스 자리에 앉아,
살만 루슈디의 소설 '광대 샬리마르'의 읽다만 대목을 펼쳐든다.
에스프레소를 건네받고, 빵을 건네주며,
"소설에 보면, 낙원은 언젠가는 무너져. 이 도시도 언젠가는 사라지겠지"
나지막한 목소리의 말끝이 햇살 속으로 사라진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바람이 부딪힌다.
“낙원은 오래 머물지 못한다니, 그래, 그래서 더 아름다운 거지.”
마지막 커피잔을 들고,
책을 덮으며 중얼거린다.
“여기선 모든 게 조금씩 가라앉고 있는데도, 그런데 그게 이상하리만큼 아름다워.”
운하 저편으로 이 계절의 빛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낡은 궁전을 바라본다.
책을 다시 펼친다.
글자들은 노을빛에 젖어 읽기 어렵고,
운하 저쪽 위로 첫 불빛이 켜진다.
하지만, 어쩌랴,
이제 더 이상 뜯어낼 절취선은 없고,
저 멀리서 종소리가 들려오면,
그 가을 아이들 웃음소리도 따라 들려오는 것을.
낙원은 오래 머물지 못한다.
그래서, 여전히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