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아는 게 별로 없었다

"레만호에 지다"

by 블루밍드림

냉정했던 야간열차는 시간을 뛰어넘어 로잔, 라보, 브베, 몽트뢰 까지 레만호 기슭을 비스듬히 가르며 계속해서 달렸다. 창밖에는 푸른 호수와 포도밭이 세밀화처럼 반짝였다. 우리 둘은 빨간 반팔 티셔츠와 치노 팬츠를 입고, 잠자리 선글라스를 쓴 채, 태어나 처음 보는 풍경 앞에서 창백하리만큼 푸른 아침 빛으로 빠르게 정신을 잃어갔다.


런던과 파리에서 기만의 불빛 아래 헤매던 지난 며칠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어찔함이었으며, 여행 가이드북 한 권을 배낭에 구겨 넣고선 아무것도 모른 채 걸어가던 방식의 두근거림이었다.


몽트뢰(Montreux)와 레만호 @lonelyplanet.com


열차에서 내려서자, 꽃, 풀, 포도, 공기, 사람, 그런 냄새가 진동하였다.


그 냄새에 취해, 여기까지 오기 전의 내 청춘의 구체적인 기억들을 떠올렸고, 꽤 힘든 시간들이었음을 인정하였다. 꺼낼 수 있는 모든 우중충한 기억들을 새로운 햇빛 아래에 널어, 바싹 말리고만 싶었다.


몽트뢰의 고급 주택들을 부러워하며 호숫가를 걸었다. 더워지는 시멘트 길가에 앉아 시원한 바람이 불 때를 기다리며 마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처럼 턱을 괴고 한가롭기 짝이 없는 잡담을 나누었다.


"날마다 이 호수를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난 그래도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가 더 좋아. 파도가 쳐야 세상이 숨 쉬는 것 같잖아."


그녀는 레만호 풍경에 심취한 채로 느닷없는 바다 예찬을 하였고, 이곳 호수에 마음을 다 내어주려던 나를 순간 머쓱하게 만들었다.




내가 짧은 배낭여행 일정에 굳이 레만호를 끼워 넣은 이유는 대충 이랬다.


"엄마, 받아쓰기 문제 내줘"

"음... 레. 만. 호. 에. 지. 다."

"ㄹㅐ. ㅁㅏㄴ. ㅎㅗ..."

"아니, 'ㅏ', 'ㅣ'가 아니라 ''ㅓ', 'ㅣ'로 써."

"엄마, 근데, 레만호가 뭐야?"


그때 엄마가 '레만호에 지다' 패티김의 노래를 듣고 있었는지, 아니면, 정애리가 나오는 드라마 재방송을 보고 있었는지, 기억은 전혀 없었다.


다만, 노래의 한 구절이 - "그 이름 잊은 것은 아니지마는 / 그 얼굴 잊은 것은 아니지마는 / 흘러간 세월 속에 묻어둔 사랑 / 레만호 호숫가에서 만났을 때에 / 나는 울었네" - 엄마에겐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래도 분명한 건 엄마와 아들 그 누구도 그 호수에 대해 아는 게 없었고, '레만호 지다' 그 말만이 그저 아득한 설렘이었다.


내 두 눈으로 바라본 레만호는, 분명 낯선 곳인데, 이상하게도 익숙하였다. 마치 오래전... 내 마음이 한 번 머물러 지났던 곳으로 다시 돌아온 것만 같았다. 멀리 떨어져서, 엄마가 나를 따라 호숫가에 서 있을 방식을 보려 할 때, 레만호는 한 점 바람의 고요로, 혹은 추억처럼 내 곁에 다가섰다.


해외여행 한 번 못해 보고 호숫가 바람처럼 져버린 엄마를 대신하여, 아들이 커서, 기어이, 그 이름 만으로도 뼈가 녹아내리는 듯한 그 호수를 찾아왔고, 흘러간 세월 속에 묻어둔 그리움을, 기어이, 그 호수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정오쯤, 태양이 치과 램프처럼 우리 머리 위로 똑바로 솟을 때 "아~" 하고 입을 크게 벌린 우리는 모든 것이 잊힐 만큼 충분히 멀리 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시옹성의 투박한 아름다움의 덫에 걸려 한참을 그 근처를 떠나지 못하다가, "그래, 유람선을 타자" 유레일패스 할인을 해준다길래 두 시간쯤 호수에 떠다닐 요량으로 배 위에 올랐다.




시옹성 (Château de Chillon)


바다처럼 넓은 호수... 태양은 호수 위에서 유리처럼 부서지고, 배는 그 위를 유연하게 미끄러졌다.


"어쩌다 우리가 이 호수에 떠 있을까?"


내 구질구질한 사연을 알리 없는 그녀도, 시치미 뚝 뗀 나도, 아무도 답을 하지 못하였다.



둥둥 둥둥 지루함을 이기려 활짝 웃기 시작했을 때, 배는 호수 맞은편 어느 프랑스 마을에 접안하였다. 에비앙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때, 아무런 신호도 없이 열 명 남짓 사내아이들이 우리 배에 올라탔다.




"사내아이들이 뭔 말이 저리 많을까?"


프랑스식 웃음은 한낮의 더위가 꽃을 말리듯 가벼웠고, 뱃전에 부딪히는 물결은 그 웃음을 실어 호숫가로 바쁘게 날랐다.


저만할 때 내 얼굴엔 어떤 햇살이 드리웠을까. 부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호숫가 산이 높아도, 그 아래 꽃그늘이 길어도, 한참을 멍하니 그 얼굴들을 바라보았다.


아차, 그들 사이에 끼어 말 대신 옅은 미소로만 대화하는 한 아이가 있었다. 다른 빛깔의 그림자를 지닌 듯한 얼굴. 내 눈에는 영락없는 한국 아이처럼 보였다. 바람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 아이의 고요에 - 나는 마치 뱃전에 철석이는 물보라처럼 적잖이 놀랐다.


"도시에서 놀러 온 아이는 아닌 것 같고…, 입양된 아이가 아닐까?"

"그러게..."


배가 부두를 멀리 떠나고, 호수가 다시 제 빛을 되찾은 후에도 그 아이의 얼굴은 여전히 물 위에 떠 있었다.




우리는 뱃고동이 불규칙하게 울리는 조용한 오후에 아이들 옆에서 다리를 쭉 뻗었고, 아이들의 알아듣기 힘든 대화 방향으로 머리를 기울였다. 산과 호수의 감미로운 듀엣 멜로디도 귀담아 들었다. 살면서 이런 휴식이 또 어디 있을까 싶었다.


"심장이 뛰지를 않습니다."


아무런 전조도 없었던 첫아이의 유산. 끔찍한 그 말을 듣지 않았다면 우리의 배낭여행은 가당치도 않을 일이었다.


낯선 아이들을 마주한 탓인지, 오래 묻어둔 그 기억이 햇살 속에 속을 드러내었다. 햇살에 꽃이 마르듯 그렇게 다시 아파왔다.


"우리 나중에 아이 한 명만 입양할까?"

"......"

"우리 애들은 두 명쯤 낳고..."

"결혼 전에 낳아둔 애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그새 바람이라도 피우셨을까?"


무데뽀 감성에 젖어 공허한 그림자가 짙게 깃든 아무 말이나 내뱉는 신랑과 냉철하게 나를 지켜주는 신부 사이의 한담은 뱃머리가 또 다른 프랑스 마을로 다가서며 그 끝을 보지 못하였다.


시옹성과 유람선 @viator.com


아이들이 배에서 내렸다. "오흐부와(Au Revoir)"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인사를 뒤로한 채 아이들이 멀어져 갔다.


우리가 남은 배는 시옹성을 향해 기수를 돌렸다.


그 순간, 뭔가 시트콤 같은 상황을 지나왔는지, "레만호 호숫가에서 만났을 때에, 나는 울었네" 그 오랜 미스터리의 본질이 뭔가 달라졌음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유람선은 물 위를 천천히 걸었다. 푸른 호수는 나를 품고, 나는 그 품 안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실 창 밖을 비스듬히 바라보는 그레이 블루 소파에 앉았다.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나뭇잎 사이로 옅은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바람이 지나는지 나뭇잎이 두두둑 흩날렸다. 이번 가을엔 난 또 무엇에 흩날릴까... 무기력하고 쓸쓸할 때 빛바랜 사진을 꺼내 다시 품어보는 기행은 본질적으로 그게 전부였다.


나의 세월은 늘 잔인하게 앞서갔다. 그리고, 나의 기억은 늘 힘겹게 그 뒤를 따랐다. 기억의 여파에 대해 생각이 떠오르면 내가 앉은자리는 그 기억이(을) 사랑했던 사람의 흔적으로 축축하게 젖어갔다.


그러면, 마치 기억상실의 병을 앓아 이전 삶의 많은 부분을 기억하지 못하게 된 것처럼, 수분크림을 덕지덕지 발라도 얼굴이 푸석푸석하기만 한 계절이면 더욱더, 새로운 버전의 기억을 갈망하였다.


레만호를 떠올리면,

받아쓰기 문제를 내는 엄마가..

프랑스 방식으로 웃어젖히는 아이들이..

흔들리는 바람에도 미소를 머금은 그녀가..

푸른빛 보다 한참을 앞서 달려온다.


아무도 아는 게 별로 없었던 그 여름날,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