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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든엄을 아시나요

'공룡을 사랑한 할아버지'를 찾아서

by 블루밍드림

(오래전 다른 곳에 올렸던 글을 옮겨 왔습니다.)


부활절 연휴를 런던에서 보내기로 하였다. 이번 런던행의 계기는 무엇보다 아이들이 탐독한 책 '공룡을 사랑한 할아버지'의 영향이 지배적이었다.


신이 나서 걸을 때면, 마치 티라노사우루스가 빙의한 듯, 반원 모양으로 구부린 두 손을 가슴팍까지 끌어올리고 허리를 45도 각도로 수그린 채 "으르렁 크르렁" 포악한 육식 공룡의 흉내를 곧잘 내곤 하던 아이들 생각에 우연찮게 집어 들었던 책 한 권. 1800년대 중후반에 세계 최초로 공룡 모형을 만든 영국 조각가 워터하우스 호킨스에 관한 그 책에 따르면, 그가 만든 공룡들이 아직도 런던 외곽의 시든엄(Sydenham)이란 곳에 남아 있다길래 온 가족 합심하여 그곳에 꼭 한 번 가 보기로 했던 것이다.




웹서핑을 해봐도 시든엄에 관한 기록은 적어도 한국의 포탈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지도 어플이 대중화된 시절이 아니었기에 시든엄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간략한 접근 방법만 확인한 채 어찌 되겠지 하는 생각만으로 런던으로 출발하였다.


첫날 바로 움직였어야 했었다. 의지 보다 더 센 피곤함에 시든엄 찾기는 그만 뒤로 뒤로 계속 미루고 말았다. 게다가 애초에 런던이란 데가 생각했던 것보다 갈 곳이 할 것이 훨씬 더 많은 그런 곳이 아니던가. 어찌 되었든 초심을 잃은 것은 분명 큰 실책이었다.


런던의 마지막 날은 기어이 찾아오고, 마음만 부산하였다. 오후 12시 40분에는 Victoria에서 Luton 공항행 버스에 올라야 했기에 사실 시간이 굉장히 촉박하였다.


"기차로 한 시간 반은 가야 되지 않을까요?"


첼시 하버(Chelsea Harbour)의 호텔 꽁시에지의 무뚝뚝한 그 대답은 "아뿔싸" 탄식을 불러왔다. 그때는 이미 아침 9시가 가까워져 오는 시간이었다. 서둘러 블랙캡 택시를 잡아탔다.


"거기까지 잘은 몰라도 700 파운드쯤 나오지 않을까요?"


한 130만 원쯤 되나? 도대체 얼마나 멀길래... 준비성 부족한 나를 스스로 탓하며, 시든엄 커뮤니티에 적혀있던 대로 New Cross Gate로 연결되는 White Chapel Station까지 일단 가자고 하였다. 그곳에 도착해 튜브 역무원을 붙들고 물어보니 London Bridge로 가서 기차를 타라는 제법 친절한 답이 돌아왔다.




런던 브리지 기차역에 도착하니 10시 30분쯤... 그만 포기하고 돌아가려다가 느닷없이 오기가 발동하였다. 매표소로 달려가 왕복 기차표를 서둘러 끊었다.



시든엄이란 곳에 도착하니 어느덧 11시... 런던을 완전히 잊을 만큼 정말로 고요한 Town이었다.


택시를 불러 타고 공원으로 가자고 했더니 다 왔다며 멈춰 선 곳은 Sydenham Park Street 주택가였다. 내가 황망해하니 운전기사가 진짜로 공원으로 가는 거냐고 되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만, 그 양반이 더 황당해하였다. 그건 틀림없이 "니들이 거기를 왜?"라고 말하는 표정이었다.


공원 입구에 도착하니 11시 15분... Victoria 도착 시간을 거꾸로 계산한 후 꼭 11시 35분까지 우리를 다시 데리러 와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손에 쥔 시간은 그렇게 딱 20분이었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공원은 뎁다 크고,

꼬맹이들을 이끌고 냅다 뛰었다.

몇 명 되지도 않았지만, 보이는 사람마다 Dynosaur가 어디 있냐고 물어댔다.


뛰고 뛰고 또 뛰고

꼬맹이들이 숨을 헉헉 거렸다. 볼도 빨갛게 부어올랐다.


그러다가... 드디어 보았다.


눈물 많을 나이도 아니건만, 핑그르르 눈물 몇 방울이 눈동자를 휘돌았다.



그놈들이었다. 책에서 보았던 그놈들, 내가 인조 초식 공룡의 감정으로 이따금 읽어주던 그놈들, 할아버지가 만들고 그 후로 백 년 하고도 오십 년을 더 살아남은 징한 놈들... 내가 가진 시간은 겨우 10분...


"왔지!? 봤지?!"

"가기 싫어."

"근데 아 진짜 왜 이런 먼 시골 구석에다 얘네들을 놔뒀을까?"


허튼소리 중에도 애들과 공룡이 모두 다 잘 보이게 사진 몇 장을 급히 찍고 나서 그만 뒤돌아서려 하였다. 그제야 그 공원의 아름다움이, 그 공룡들의 위대함이 도도하게 물밀려 왔다.



약속한 11시 35분까지 불과 몇 분만이 남았다.


"뛰어!"


드넓은 공원을 가로질러 다시 뛰었다. 열라 뛰었다. 아이들은 곧 뛰기를 거부하고 흐느적거렸다.


공원 입구로 되돌아왔더니, 있어야 할 택시가... 없었다. 역까지 뛰어 말아, 계속 기다려 말아,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바람은 살을 에고, 십여 분을 실성한 듯 서성거린 후에야 그 택시를 다시 보았다. 기사 양반은 그새 초췌해진 우리 몰골이 우스운 것인지 연신 콧노래를 흘려댔다.


택시 안에서 아이들은 지치지도 않았는지 쉴 새 없이 투닥거렸고, 나는 Vitoria까지 제시간에 갈 수 있을지 시름이 깊어갔다.




그래도, 공룡 책을 읽다가 시든엄이란 곳까지 찾아간 최초의 한국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허튼 자부심과, 그래도, 아이들이 커서 아빠의 눈물겨운 고군분투를 기억할 때면 겉으로나마 고맙다고 해 주지 않을까 하는 자기 충족적 예언을 하며, 그 후로도 오래도록, 홀로 외로이 우쭐대었다.



*표지사진: ala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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