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생애 최고의 크리스마스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애써 감춘 이마 주름이 언뜻언뜻 드러난 남자는 올해도 플라스틱 트리 아래 크리스마스를 증명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 일을 관둔 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어쩌면, 길고 긴 세월 동안 짊어졌던 크리스마스의 무게를 이제는 그만 내려놓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남자는 지난밤 우우웅 소음 속에서 커피를 내렸다. 그 소리가 홀로 듣는 크리스마스 캐럴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저 들 밖에는, 한밤중에는, 눈이 펑펑 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한 고요가 어깨 위로 내려앉자, 남자는 길게 숨을 골랐다.
저 들 밖에
한밤중에
양 틈에 자던 목자들...
남자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크리스마스 날에 눈이 내려도, 이제는 설렘보다는 안도가 먼저 와, 슬그머니 자기의 무릎을 베고 눕는다는 것을.
남자는 홀로 깨어 성탄절 아침이 스며든 집안을 쓱 둘러보았다. 현관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하였다. 반짝이는 전구의 불빛은 없어도, 어쩌면, 그 순간 그 공간 속에 존재하는 - 나를 살게 했던(하는) - 것들로 크리스마스는 충분할 지도 몰랐다.
남자는 아직 어둑한 창 밖을 바라보며, 지나온 성탄의 날들이 점점이 이어진 그 길 위엔 벌써 눈이 소복소복 쌓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꿈속에 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
또다시 돌아왔구나...
밤새 닫혔던 창을 열어젖히자, 파르르 바람이 떨었다. 스파게티 면을 삶으려고 가스 불 위에 올려 둔 물이 보글보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모든 게 남자에게는 짤랑짤랑 은종(銀鐘)의 축복처럼 들려왔다.
남자는 특식으로 알리오 올리오를 요리할 생각이었다. 그 생각이 점점 흐릿해지더니, 섬망 증세처럼, 시간을 잊고 공간도 잊은 채, 남자는 어느새 생애 가장 아름다웠을 옛날 크리스마스 이야기 속으로 깊게 빠져들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마켓이라고 하면 역시 오스트리아라고들 하길래... 12월 24일,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잠이 덜 깬 아이들을 둘러업고 나와 멀리 잘츠부르크를 향해 차를 달린다.
몇 시간 만이던가, 마침내 잘츠부르크에 도착해 미리 받아 적어 놓은 주소로 찾아갔건만... 아무것도 없다.
"이건 뭔 시추에이션?"
당황한 아빠를 놀리려는 듯 아이들은 두 손을 위로 펴고 어깨를 실룩거린다.
지나가던 사람이 툭 던지는 "Closed."
짧은 대답 하나가 실낱같던 희망을 싹둑 잘라버린다.
잘츠부르크를 증명하려 우리 집 전속 모델을 한 컷 찍는다. 미련의 1/4 쯤 채웠을까, 그 자리를 떠난다.
크리스마스의 오스트리아. 이곳 사람들은 우리가 스키를 타러 이곳까지 온 것이라 지레짐작을 해 버린다.
그렇다면야... 까짓것 그렇게 해버리지 뭐.
스키장에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아이들이 걱정돼, 그나마 낮은 슬로프가 있다는 루스바흐(Russbach)로 향한다. 호텔 주인의 추천도 같다.
크리스마스 아침의 스키장은 눈부시게 밝은 색이다. 메리포핀스 동화 속일까? 무디기 짝이 없는 눈에도 참 멋지다.
스키스쿨에 찾아가 아이들 한 시간 개인 강습을 끊어달랬더니, 접수 직원은 강사와 통화하며 자꾸만 일본사람들이 왔다고 말한다. 그래, 그냥 일본인으로 하자.
실비아 할머니는 열정적으로 독일어를 말하고, 아이들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할머니가 강사일 줄은 정말 몰랐다.)
미니 슬로프에서 잠깐 자세를 잡아주나 싶더니 - 눈썰매나 타자던 겁 많은 녀석들인데 - 곧장 리프트에 태워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실비아는 아이들이 스키를 정말 잘 탄다고 한다. 강습이 끝난 뒤 다시 마주쳤을 때도 같은 말을 한다. 빈말은 아닌 듯싶다.
심봤다!
고작 한 시간을 배웠을 뿐인데도, 아이들은 지네들끼리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 활강을 한다.
스키장을 떠나 호텔 주인이 그려준 지도를 들고 동네 수영장을 찾는다.
수영장 너머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풍경에 눈이 시리다.
수영장 옆 핏제리아. 할머니가 내어온 마르게리타 피자와 토마토소스 스파게티는 소박한 사치다.
밤이 짙게 물든 하늘엔 별이 총총하다.
"앗, 북두칠성!" 큰 아이의 외침이 산골 어둠을 가른다.
"스키 사줘!" 작은 아이의 칭얼대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흩어진다.
그 모든 게 어느 멋. 진. 날. 엔딩 크레디트로 흐른다.
남자는 창가로 다가가 크리스마스 아침의 기세에 밀려 일제히 퇴각하는 어둠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오늘은 어쩌면 눈이 내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슬어슬 한기(寒氣)에 뒤돌아서자, 플라스틱 트리도, 크리스마스를 증명하는 선물도, 반짝이는 전구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I don't want a lot for Christmas
There just one thing I need...*
"아, 맞다. 스파게티!"
남자는 깜짝 놀라 주방으로 뛰어갔다.
남자는 황급히 냄비 뚜껑을 들어 올리면서도, 어느 옛날 아주 멋졌던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추억에 젖어 눈 깜빡임조차 아끼며 실웃음을 꼭 붙들고 있었다.
*머라이어 캐리의 크리스마스 캐럴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