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으로 가는 은하수 기차

by 블루밍드림

깊은 밤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도 더는 "쿵" 무너져 내리지 않게 되었지만, 밤이 유독 깊다 싶으면, 쿵쿵 찧어대던 그 자리가 이상하게 아파왔다.


지난밤에는 창을 열어 시커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둠 저 너머로 행여라도 은하수 철로를 달리는 기차가 보일까 싶어서였다.


기차가 달리고, 나는 고독하고, 애증의 지평선은 멀기만 하더니만, 잠 못 드는 그 밤의 끝에서, 난데없이, 내 삶의 챕터마다 겹쳐 비추듯 흔들리는 도시, 런던을 만났다.




신입사원의 허물을 막 벗어던질 때쯤이던가. "힐튼 계약서 누가 제일 잘 알아?" 다가서기 무섭던 실장이 툭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난 실장의 가방을 들어주는 따까리로서 첫 해외출장길에 올랐다.


미도파백화점에서 비싼 슈트케이스를 하나 샀다. 그 안에 실장이 들고 오라던 도자기 굴비를 행여나 깨질까 조심스레 담아 넣었다.


런던에 도착하여, 우아하기 그지없는 랭엄(The Langham London) 호텔에 들었다.


슈트케이스… 그 속은 지옥이었다. 비릿한 바다의 향이 터져 나와 정장이며 구석구석 꼭꼭 잘도 배어들었다. 속옷과 셔츠라도 급히 손빨래를 하고 헤어드라이어로 말려보려 했지만, 밤은 깊고, 절망은 등골을 타고 찌릿찌릿 흘렀다.


계약 협상 자리에 참석해서도, 킁킁 킁킁... 폭망이 나를 죽였다.


귀국하자마자 사직서를 던질 거라며 연신 눈물을 삼켰다.


실장이 굴비를 들고 지인을 만나러 간 사이에, 이리 걷고 저리 걸어 런던브리지에 도착하였다.


"누가 누가 놓았나 조그만 돌다리 바둑이도 건너가는 징검다리"


어릴 적 곧잘 불렀던 톡톡 튀는 이 동요가 "London Bridge is falling down, falling down, falling down, London Bridge is falling down, My fair lady" 이 이상한 노래의 번안곡이라는 걸 알게 된 후, '그 다리는 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다. 멋들어진 타워브리지를 닮았을 거라 생각하였다.


'별 볼일 없는' 그 다리 위에서 나는… 또다시 무너져 내렸다.




사직서를 내밀지 않았더니, 또 살아졌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결혼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와 둘이서 배낭여행을 떠났다. 새로운 런던을 보려 하였다.


하지만, 우리 둘은 서로에게 너무 서툴렀다. 랭엄 호텔이 멀지 않은 피카딜리 서커스의 우아한 길 위에서 생수 한 병을 누가 사 올 건지를 두고 격렬하게 다투었다. 독이 밴 사과를 입에 물었는지 끊임없이 독에 쩐 말들을 내뱉었다.


신혼여행을 떠났다가 남이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는 사연이 우리의 이야기가 될까 두려웠다.


"London Bridge is falling down" 그 노래의 저주일까, 다시 찾은 런던의 무게는 여전히 버거웠고, 또다시 절망이 나를 죽였다.




길 모퉁이의 빨간 전화부스를 보았다. 중력에 끌리듯 그 속으로 들어갔다. 젖은 유리창에 비친 내 젊은 얼굴은 지친 그림자와 같았다. 전화를 걸 곳도 없으면서, 수화기를 귀에 바짝 붙였다. 그냥… 누군가가 받아줬으면 좋겠다 싶었다.



"여보세요? 거기… 누구 있나요?"

"......"

"여보세요? 나야, 나. 어떻게… 넌, 아니, 난… 잘 지내고 있어?"

"......"

"난 말이야, 지금 잘 모르겠어. 대체 내가 왜 이럴까? 이 좁은 부스 안이 지금 내 세상의 전부인 것만 같아. 그만 이 소요를 빠져나오고 싶어."


뚝뚝 동전 떨어지는 소리라도 들린 걸까. 못다 전한 말이라도 있는 걸까.


내 가슴 한구석이 쿵 내려앉았다.


그 후로 그 꼴이 우스웠는지, 그녀가 나를 용서했다. 아니, 눈 감아 주었다.


타워브리지


다시 손을 잡고 다시 어깨를 나란히 하여 런던 거리를 걸었다.


Hop-on Hop-off 빨간색 이층 버스는 런던브리지를 데면데면 스쳐 건넜고, 잠시 뒤 아주 멋진 타워 브리지를 향해 돌진하였다.


나는 두 손을 높이 쳐들고 "후레이"를 외쳤다.





그 후로도 그녀와의 다툼은 간간이 이어졌다.


세월은 야속하게 흘렀지만, 큰 선물도 안겨주었다. 아이들이 생겨났다.


아이들의 손을 이끌어 또다시 런던을 찾았다. 아이들은 자기들의 이유로 런던을 좋아했다. 버킹엄 궁전 근위병 교대식에 환호하고, 내셔널 갤러리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트라팔가 광장의 비둘기를 뒤쫓았다.

엄마와 아빠가 살벌하게 다투던 피카딜리 서커스 길 위에서는 그날의 전투 장면을 캔터베리 이야기의 한 대목처럼 실감 나게 들려주었다.


룰루랄라 길을 걷다가, 어느 길 모퉁이에서 여전히 새빨간 전화부스를 보았다.



아이들이 전화부스에 들어갔다. 수화기를 들어 귀에 갖다 대었다.


누구일까? 먼 훗날의 다 큰 자기들? 지금의 엄마 아빠? 아니면, 더 먼 훗날의 늙은 엄마 아빠일지도…


낯설지 않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심장이 순간적으로 멈추었다. 어쩌면… 먼 옛날 아빠가 걸어온 전화를 지금에야 받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얘들아, 아빠 지금 피카딜리 근처야. 엄마랑 싸우고… 미안한데도 말을 못 하고 있어.”


아이들은 전화부스 문을 붙들고 연신 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아빠, 괜찮아. 엄마 금방 풀려.'


빨간 전화부스는 두 시대의 나를 잇는 작은 문이었던 걸까. 고민하던 젊은 내게, 시간이 훌쩍 지나, 전화를 다시 걸었다.


"듣고 있니, 과거의 나? 다 괜찮아, 그러니, 기죽지 마. 여행안내서도 무겁던 그 손으로 네 가족들을 잘 지켜내고 있잖아. 없을 뻔도 했던 네 아이들이 저 안에서 신나 하잖아."



런던 아이(London Eye)가 천천히 상승하였고, 우리의 시간이 둥글게 휘돌며 하나로 얽혔다. 발아래로 템스 강이 휘감아 도는 런던이 마치 우리 가족의 긴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주고 있는 듯하였다.


또다시 Hop-on hop-off 빨간색 이층 버스를 타고 런던브리지를 건넜다. 그리고, 버스가 타워브리지를 향해 돌진할 때에 아이들은 두 손을 높이 쳐들고 "후레이"를 외쳤다.




그리고 한참을 또 잊고 살았다. 그리고, 런던브리지는 무너지지 않았다.


지난 긴 세월, 사람들은 'London Bridge is falling down' 그다음에 이렇게 이어 불렀다.


나무와 진흙으로 쌓아 올려요 - 나무와 진흙은 씻겨 나갈 거야.
은과 금으로 쌓아 올려요 - 금과 은이 내게는 없어.
철골로 쌓아 올려요!


런던은 내게 절망과 화해, 그리고 재건의 성장 드라마를 선사한, 내 삶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애틋한 도시였다.




지난밤에는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아파오길래,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적막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은하수 기차에 올라타고선 고독한 길을 달리는 꿈을 꾸었다. 그 길 끝에서 런던에 도착하였다.


빨간 전화부스를 찾아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거기… 누구 있나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아니, 불안하고 서툰 젊었던 내 목소리가… 지지직 거리며 들렸다.


정적이 잠시 흘렀다. 전화부스 안 공기가 살짝 흔들렸다.


"어, 그래, 나야. 너 정말 애썼다. 나… 잘 지내고 있지. 그때 잘 버텨줘서 정말 고마워."


내 젊은 날의 불안과 서툼과 두려움이 그 빨간 상자 안에 고이고이 갇혔다가, 이제야 다시 나이 든 내게 건네진 것 같았다.


핸드폰에서 모닝콜이 울렸다.


그날 밤, 빨간 전화부스에서 나와서는, 나는 긴 밤이 다 끝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