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 전화벨 소리

by 블루밍드림

어쩌다 밤이 깊어 전화벨이 울리면, 가슴 한편이 쿵 내려앉곤 하였습니다. 며칠 전 깊고 축축한 밤에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설마.. 아니겠지.' 하면서도, "쿵" 오랜 습관은 변함이 없더군요.


"아빠, 돌아가셨어."


파르르 떨리는 전화 속 목소리의 파동이 비스듬히 일으킨 내 몸의 등골을 타고 그대로 흘렀습니다. 신경질적으로 불을 켜자, 마침내 깨져버린 내 오래된 습관의 파편들이 흉측한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주섬주섬 검은 정장을 찾아 입고 밤길을 나섰습니다. 밤벌레처럼 거리를 헤매 돌 때에, 딸깍딸깍 암흑에 부딪히는 방향지시등 마저 내 썩은 영혼을 빠르게 좀먹는 것만 같았습니다.




엄마가 일찍 세상을 등진 것은 죄다 아버지 탓이라 믿었습니다. 별빛, 달빛, 심지어 인공위성의 희미한 빛마저 깡그리 죽어버린 검은 하늘 아래, 세월의 아픔은 깊고도 길었습니다. 어쩌면, 아버지가 먼 곳 산중에서 외로운 자연인으로 살아가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생면부지 남보다도 나을 게 없는 오랜 관계는 그새 핏기를 잃어버린 잿빛 얼굴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져 버렸습니다.




임종한 대학병원엔 빈 장례식장이 없다 하여 장례지도사가 서울과 가까운 데서 급히 찾아온 곳이, 하필이면, 엄마를 먼저 떠나보낸 그곳이었습니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다 있을까.. 엄마 - 아버지.. 일부러 먼 거리를 두고 살았건만, 이건 업보라고 믿어야만 했습니다.




상복을 입고, 두 줄 삼베 완장을 차고, 그렇게 또다시 상주가 되었습니다.


복도를 따라 화환이 길게 늘어서자, 병원 식당에서 들고 온 육개장 냄새와 빈소의 향내가 번갈아 가며 그 위를 흘러 다녔습니다.


입관을 하며, 처음으로 눈물이 차올랐습니다. 어쩌면, 악어의 눈물일지도 모르지요.


사흘째 되는 날, 캐딜락 영구차는 서울추모공원을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평생을 교직에 몸 담았고, 퇴임했던 학교가 그리 멀지 않은데도, 학교 담벼락을 따라 한 바퀴 돌아보는 배려조차 내쳐버린 냉정한 자식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장례가 끝나기를 기다려 엄마가 계시던 곳을 파묘하고 멀리 충주에서 화장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낯선 땅에, 아버지의 세월을 남김없이 묻어버렸습니다. 그 곁에 어머니의 남은 흔적도 같이 묻었습니다. 살아있는 자식이 저지른 짓이니, 이 결정을 두고 서로 다투지 말기를 신신당부하였습니다. 신장 한쪽 떼어주듯, 간 한 조각 잘라주듯 흙을 덮고서는 꾹꾹 밟아버렸습니다.


뒤는 동산이고 앞은 개울이니, 배산임수 명당자리라며 혼자서 주절거렸습니다. 초겨울 바람이 차디차도 옅은 햇살이 은은하게 드리웠으니.. 이젠, 내 기억이 무뎌지도록, 두 분의 흔적이 땅속으로 녹아내리도록 세월 속에 가만히 놓아두면 되겠다 싶더군요.


빛 좋은 과일 몇 알과 반질거리는 과자 몇 개, 그리고 정종 몇 잔으로 배도 채웠겠다 이제 그만 먼 여행을 떠나시라고 재촉을 하였습니다. "가세요. 가세요." 아주 먼 곳으로 떠나시라고 쉴 새 없이 등을 떠밀었습니다. 나고, 자라고, 귀밑머리 세어가는 지금껏, 어쩌면 내 삶 속에 숨어산 또 다른 생명이었을 그분들을 매몰차게 떠나보내려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넓은, 끝 모를, 광야를 걸어가더군요. 그 길 위로 거뭇거뭇 마른 비가 후립니다. 해가 뜨지 않았으니, 해진 가슴 얼기설기 꿰매어 낮달처럼 걸어볼까요.. 그래도, "집이 편하지. 뭐 볼 게 있다고 멀리 가라는지.." 먼 여행을 떠나라고 징징대는 철없는 자식이라 원망할 것만 같습니다.


용인을 떠나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평일 오후인데도 지루하게 차가 밀렸습니다. 이제 더는 밤늦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두렵지는 않겠지요.




어릴 적 사진 속에서, 난 아버지 품에 안겼고, 동생은 엄마 손을 꼭 잡고 서 있더군요. 엄마가 떠났고, 이제 아버지도 떠나고.. 사진이 그만 휑 합니다. 한 시대가 무너져 내린 듯합니다.


목적지에 도착은 하였는지.. 그곳엔 꽃이 가득 피었는지, 향기는 나는지, 개똥지빠귀와 박새가 있어 노래라도 부르는지.. 아니면, 알록달록 나뭇잎이 물들고, 시냇물이 계곡 따라 흐르고, 이따금씩 선선한 바람이 불어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가로등 하나 없는 깜깜한 골목길에 눈보라가 휘몰아치는지도 모르지요. 그곳 낮엔 해가 얼마나 높이 뜨고, 밤은 또 얼마나 길어서 달빛 별빛을 붙드는지..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은 미움을 남기고, 메말라 쩍쩍 갈라진 그리움을 남기고 그리 떠났으니.. 그곳에 도착하거든.. 엄마, 엄마라도, 잘 도착했다고, 가는 길에 다투지는 않았다고, 그곳은 꽤나 멋지다고, 편지 한 장 보내주세요.




뭐라도 기다리고 있어야만 할 것 같아, 먹먹한 가슴에서 뜯겨 나온 파편들을 주워 모아 하나 둘 세고 앉았습니다. 연신 동생에게 전화질을 해댑니다. 지난 수개월 동안 건 전화 보다도 훨씬 더 많습니다. 스스로 멈출 방도가 없어 보입니다.




*지난주 깊고 푸른 어느 밤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휴재 공지 하려다 말고 두 번 적지 않을 낯선 글을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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