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친퀘테레
하루가 다르게 가을색이 짙어져 갔다. 그럴싸한 성과를 내야만 하는, 썩 내키지 않는, 긴 출장길이었기에 밀라노는 내겐 그저 허울 좋은 도시일 뿐이었다. 어둠살 짙어가는 스산한 저녁, 성악 공부하러 이탈리아에 왔다가 영영 눌러앉고 말았다는 총무팀 청년의 오 솔레미오 열창으로 두꺼운 비닐을 둘러친 레스토랑의 테라스가 후끈 달아올랐다. 내남없이 세상 사는 일 참 둥글다 싶어 괜스레 가슴 한켠이 저미더니, 그날밤 가을을 파장하는 비가 내렸다.
밀라노까지 와서 빗물 듣는 캄캄한 소리를 세는 내 꼴이나 이름만 그럴싸한 낡은 호텔 방구석의 퇴색한 카펫이나 딱하기는 매나 마찬가지였다. 아침 눈을 뜨자 파르티잔 노병 같은 햇살에 빈 속을 드러낸 와인병 하나가 창가 테이블에 놓여있었다. 밤이 깊도록 내가 센 건 빗소리가 아닐지도 몰랐다.
비 개인 맑은 아침, 테이크아웃 카푸치노 한잔의 온기만으로 겨울이 가까움을 직감하였다. 그 겨울의 바람 속을 걸을 때면 이탈리아를 떠날 테고, 그 후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음을 예감하였다. 한창 젊을 때라면 가면 가고 말면 말고 했겠지만, 그날따라 이탈리아 북서쪽 몹시 외진 곳 친퀘테레(Cinque Terre)에 몹시 가 보고 싶었다.
마음이 바빴다. 밀라노 남남서 방향 지중해 한 귀퉁이 리구리아 바다로 내달렸다. 세 시간쯤 후, 높은 산들이 나타나 바다와 내륙을 극명하게 갈라놓은 지점에 다다랐다.
산등성이 어느 마을의 작은 바(Bar)에는 주인장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스팀밀크가 잔뜩 올려진 커피잔을 건네받았다. 두 남자 사이의 무뚝뚝한 공간에 커피 향기가 빠르게 배어들었다.
마을 입구 교회의 문을 빼곰히 열어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찬송도 없고 기도도 없었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벽화가 반쯤 뜯겨 나간 조그만 예배당 속에서 길을 잃어 한참을 주뼛대었다.
아마도 난 전지전능과 운 좋게 독대(獨對)하여 내 속의 자디잔 미련을 알알이 세려 했겠고, 교회는 내게 과거로 돌아가는 길을 쉽게 열어 주려 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래도, 소박하게 디자인된 스테인드그라스를 통해 한줄기 빛이 내게로 뻗친 것만큼은 분명하였다.
오른편으로 가파르게 내려앉은 바다와 나란히 산마루 길을 달렸다. 그러다, 뭇사람이 사는 뭍이 싫어 외떨어지려 했을까, 낭떠러지 기어 내리듯 천천히 내려서서 다섯(친퀘) 마을(테레) 가장 북쪽의 몬테로소 알 마레(Monterosso al Mare)에 도착하였다.
파도가 성을 내면 금세 집어삼킬 것만 같은 갯벌 주차장에 차를 쉬게하고서 사람들이 모여 선 곳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무작정 걸었다. 그곳이 어떤 곳일지 알 리가 없었다. 짙푸른 바다를 동무삼아 새파란 하늘 쪽으로 걸어 올랐더니 세상과 등진 골목에까지 찾아들었다.
수줍은 은둔의 가을빛에 세속에 쩐 눈이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분명 아까 그 교회에서 보았던 빛깔인데 싶었다. 그곳에선 열리지 않았던 길이 저 앞에 놓였을지도 몰랐다. 걸음걸음마다 키가 점점 줄어들어 아이가 되었다.
남들과 다른 길을 걸었더니, 미련한 그리움을 잔뜩 안아 골목을 돌아 나왔다. 그새 키가 다시 자랐다. 멀리 몬테로소 알 마레 풍경 위로 제법 쨍쨍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기세가 등등했으리라. 설령 여기서 길을 잃는다 해도 대수롭지 않을 것만 같았다.
지난여름에는 무척 번잡했을 이런저런 가게를 기웃거리며 지났다. 어찌 보면 아주 특별할 것까진 없어 보이는 지중해 연안의 휴양지를 걷고 또 걸었다. 터널 속을 걸었더니 옛 마을이 나타났다. 때 마침 점심 장사를 위해 문을 여는 레스토랑에 털썩 주저앉았다. 붉은 와인 몇 잔에 볼이 불에 덴 듯 달아올랐다. 코앞의 바다 빛깔이 시나브로 파래져갔다.
두 번째 마을은 베르나차(Vernazza)였다. 그곳으로 가려해서야 알게 되었다. 다섯 마을을 차를 몰아 다니기란 무모한 짓이었다. 다들 해안선 기차를 타는 모양이었다.
신박한 결심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산을 넘기로 하였다. 지난여름의 폭우로 산길은 위험하다는 경고문을 읽었다. 무모하리만큼 가뿐하게 금줄을 넘어버렸다.
"산이 부른다. 구름에 솟은 산이 햇빛도 따스하고 바람도 시원해." 노래가 절로 나왔다. 돌 많고 가파른 땅 곳곳이 포도밭이었다. 지난 계절 그 밭을 경작했을 억센 노새를 떠올리며 수확이 이미 끝난 포도밭 사잇길을 힘차게 걸었다. 낭만 덕인지 과했던 낮술 탓인지 갯바람은 와인향을 실어왔다.
산은 여전히 높았고 걸음은 확연히 느려졌다. 서울에선 여럿이 무리 지어 걷다 보면, 그게 점심 후 산책길이든 뭐든 간에, 앞서 빠르게 걷는 이들이 생겨나게 마련이었다. 내 걸음이 딱히 느린 것 같지는 않아도 어느새 뒤처져 쫓아가기 일쑤였다. 그것도 꽤나 신경 거슬리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무리를 지은 다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배제당하지 않으려 무리에 끼지 못한 소수의 사람들을 배제당한 채로 버려둔다고 하지 않던가. 그걸 신경 쓰면 감정적이 되고, 애써 무시하면 또 예민해졌다. 베르나차로 가는 산길에선 뒤쳐진다고 뭐랄 사람도 없고, 인적 드문 그 길에서 설령 어떤 이가 저만치 앞서 간대도 마음이 바쁠 이유는 없었다.
순간의 차이였다. 짐을 잔뜩 진 늙은 노새가 걷던 그 길 위에서 거친 숨을 헐떡였고, 댓 걸음마다 돌계단에 걸터앉아 노랗게 변해 가는 하늘빛을 원망하였다. 남들과 다른 길은 과욕이었다. 아니 만용이었다. 심장이 조여들었다. "균형을 잃고 잡초 속으로 넘어졌는데 잠이 들었고 잠시 후 계속 걸었다. 그리고서 다시 넘어졌다. 하지만 일어나서 조금씩 조금씩 계속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팡이를 짚고서 홀로 10 킬로미터를 걸어 러시아 점령지에서 탈출했다는 아흔여덟 우크라이나 여인의 이야기를 애써 떠올렸다.
5 킬로미터 남짓인데, 두어 시간을 걸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바다를 향해 내리 꽂힌 산비탈에 멈춰 섰다. 새파란 바다 풍경 위로 늙은 가을이 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느리게 흘렀다. 흥하지 못하고 어느새 쇠해버린 파르티잔 회사원의 젊은 날 초상이 그 바다 풍경 속으로 자맥질하려는 그 찰나에 베르나차가 내 삶 속으로 뛰어들었다.
친퀘테레 두 번째 마을 베르나차로 가는, 무척 힘들었던, 다른 길은 하늘에 뜬 신비한 라퓨타(La Puta)로 이어진 길이었다. 라퓨타에서 베르나차를 굽어보는 그 순간 세상은 너무도 조용하였다.
"오해받고 무시당하고 비난받고 때로 시련까지 받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고난은 우리 영혼의 맥박입니다. 낡은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당하고 눈물 어린 선함과 옳은 마음 때문에 비난받는 그 상처로 빛나는 자기다움을 믿으십시오." - 박노해 <다른 길> '작가와의 대화' 중에서
산타 마르게리타 안티오키아 성당 앞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골목이 집이요 집이 골목 같은 길을 따라 도리아 성에 올라서도 멀리 바다를 바라보았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언제 아팠냐는 듯 고동치는 내 심장의 포효와 같았다.
그제야, 사람들을 쫓아, 기차역으로 향했다. 세 번째 마을 코르닐리아(Corniglia)는 부러 지나쳤다. 바다가 기차역이요 기차역이 바다 같은 곳에 내렸다. 네 번째 마을 마나롤라(Manarola)였다.
곰살맞았더라면 좋았을 카페 주인에게서 젤라토 한 컵을 받아 들었다. 카페 밖 좁은 공간은 한국말, 중국말, 온갖 세상 말로 혼잡하였다. 난 큰맘 먹고 찾았는데, 세월이 나를 가만두지 않았구나 싶었다. 오랫동안 버텨왔던 핸드폰의 배터리 잔량 1% 표시가 끝내 사라졌다. 준비가 덜 된 여행은 추억의 한 장면을 놓쳐야 하는 상처를 남기는 법이었다.
다시 기차에 올라 마지막 마을 리오마조레(Riomaggiore)에 당도하였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는 무렵이 되어서였다. 산조반니 바티스타 성당을 찾아 언덕길을 올랐다. 수평선 너머로 해 지는 광경을 배터리를 다시 살려낸 1초의 시간 속에 고스란히 담았다. 뿌옇긴 해도, 친퀘테레를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기억할 이별의 증표였다.